도슨트도 무료?
나는 왜 런던을 예술과 큰 접점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을까? 미술은 프랑스 파리, 클래식은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1차원적인 사고. 하지만 이는 큰 오해였다. 런던은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역사와 예술을 친절하게 베푸는 곳이다.
친절함의 척도는 ‘돈’이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같이 유명 작품을 많이 보유한 곳들은 입장료가 꽤나 비싸다. 그에 반해 런던에 있는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입장료가 무료다. 보통 공짜라 하면 기대감이 낮아지기 마련인데, 이곳의 시설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 이상의 수준이다. 이건 상냥함을 넘어선 과분한 선물이다.
대표적인 곳들만 나열하는데도 손가락이 거의 다 접힐 정도다. 전 세계 문화유산이 모여있는 ‘대영박물관’(수집 방식이 약탈이라는 게 아쉽지만). 공룡의 흔적을 볼 수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자연사 박물관’. 현대미술의 대명사 ‘테이트 모던’. 런던 최대의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이 중에서 오늘 갈 곳은 내셔널 갤러리다.
런던은 이스트앤드(동쪽)와 웨스트앤드(서쪽)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 내셔널 갤러리가 위치한다. 부유층이 많은 서쪽과, 상대적 빈곤층이 많은 동쪽. 모두가 예술을 즐기길 바라는 의도로 이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런 깊은 뜻을 갖고 있다니. 무료 관람은 어쩌면 당연한 서비스였을지도 모른다.
예매는 필요 없지만 예약은 필수다.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라 사전예약을 하지 않으면 황금 같은 시간을 줄 서는데에 빼앗길 수 있다. 나는 계획형 인간답게 내셔널갤러리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을 했다. 그런데 잊고 있었다. 런던에서의 나는 즉흥적인 인간으로 변했다는 걸. 다른 곳을 구경하다가 입장 시간보다 한참 뒤에 도착하고 말았다. 결국은 줄을 서서 들어갔다.
아무렴 어때.
유명 작품을 만나는데 이 정도 수고로움 쯤이야!
내셔널 갤러리에는 여러 시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은 단연코 인상주의 섹션이다. 인상주의 그림들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을까. 신을 숭배하는 고대 혹은 중세 미술은 와닿지 않고, 동시대를 함께하는 현대미술은 모호하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려낸 세상이 가장 따스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마음인가 보다. 이 시대를 위로해 주는 그림 같달까.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파블로 피카소, 폴 고갱, 조르주 쇠라 등. 이름만 들어도 눈이 번쩍 뜨이는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한 곳에 모여있다. 어릴 적 보았던 미술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파노라마로 넓게 펼쳐놓은 것 같다.
안타깝지만 이 안에서도 인기 순위는 나뉜다. 전 세계인의 최애화가는 역시 고흐. 그의 작품 앞에는 사진 찍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하지만 인적 드문 그림이라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 그림 좀 맘에 드는데?’ 해서 보면 클림트. ‘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했더니 르누아르. 사방이 거장의 작품들이다.
이곳이야말로 장인의 아뜰리에다.
명함 좀 내미는 거장들의 작품에 감탄하던 중, 낯익은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어둑한 배경에 무채색 옷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 나는 이 작품을 그린 화가를 안다. 분명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아... 어디서 봤더라. 낯은 익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기억을 떠올리려 그림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빌헬름 함메르쇼이. 그림 오른편에 적힌 그의 이름을 보니 생각이 났다. 몇 달 전 서울에서 열린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에서 그의 작품 한 점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전시 해설을 맡은 도슨트분이 말했었다. 이 화가를 주목해 달라고. 그 말을 흘러 듣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기서 그의 두 번째 작품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냐고.
고요한 집 안 풍경. 그림 속 여인은 그의 아내다. 특이하게도 앞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뒷모습 혹은 옆모습만 묘사한다. 정적이지만 우울하진 않은 분위기. 이 그림은 내 맥박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치 관자놀이에 바른 아로마 오일처럼.
이 그림 앞을 혼자 우두커니 지키고 있었다. 나만 알고 싶은 맛집을 찾은 것 같은 기쁨. 먼 타국에서 화가를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 잊지 않고 기억해 냈다는 뿌듯함. 잔잔한 그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의 남성이 말을 건다. 중년이라기엔 늙고, 노년이라기엔 젊은 백인 남자였다. 뭐지? 또 ‘도를 아십니까’ 인가...
한 번 당한 전적이 있는지라 일단은 그를 경계했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그의 입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모양에 집중했다. 그는 그림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이 그림과 화가를 알고 있냐고 했다. 왠지 모르게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나를.
‘저는 한국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 작가의 그림을 봤어요. 그리고 런던에서 두 번째로 그의 작품을 보네요. 여기서 다시 보다니… 너무 신기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은 금붕어처럼 뻥긋거릴 뿐. 런던에서의 일주일은 내 영어실력을 조금도 향상시키지 못했다. 나는 굴뚝같은 마음을 짧고 굵게 요약해서 전달했다.
"이 화가의 그림을 한국에서 봤어요."
이 화가와 내가 초면이 아니라는 것을 들은 할아버지는 갑자기 그림에 대한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영어로… 내 모자란 외국어 능력을 파악한 건지 최대한 또박또박, 천천히, 쉬운 단어로 말해주셨다. 이분의 친절함에 보답하고 싶었다. 대꾸는 할 수 없었지만 당신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눈빛을 내보냈다.
“혹시 그림을 공부하나요?”
그는 나를 예술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오해했다.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서 일한다고 답했지만, 그의 연설은 멈추지 않았다. “예술로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옆 섹션에 있는 다른 그림을 가리키며 또 설명을 시작했다. 개인 도슨트 투어나 다름없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느라 내 몸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있었다. 점점 독해력은 떨어졌고, 똘똘한 눈망울도 조금씩 탁해졌다.
곧 미술관이 문을 닫는다는 직원들의 외침이 들리자 도슨트 할아버지는 마음이 급해진 듯했다. 런던에는 내셔널 갤러리 말고도 훌륭한 미술관이 많다며 추천 장소를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다.
“혹시 칸딘스키를 알아요? 테이트모던에 그의 그림이 있어요”
“네, 어제 그곳에 다녀왔어요. 그의 그림도 봤고요!“
“잘했네요. 테이트 브리지도 가봤어요? V&A미술관도 좋아요.“
아쉽지만 내일 한국으로 떠난다고 대답했다. 그는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뉘앙스로 안녕을 고했다. 폐장시간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정작 그에 대해 묻지 못한 것이 계속 아쉬웠다. 할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었을까. 미술을 공부하셨나? 아님 런던 사람이라면 이 정도 예술 상식은 기본인가.
무료 관람과 해설, 감사했습니다.
오늘 런던의 예술적 친절함을 가득 받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