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 눈앞에 나타나
오늘만큼은 이 수칙들을 지켜야 한다.
첫째, 갑자기 경로를 이탈하지 말 것.
둘째, 주어진 시간을 초과하여 머무르지 말 것.
셋째, 일정 순서를 변경하지 말 것.
금일 저녁 8시, 나는 인천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내게는 다음이 없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나는 런던에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시 온다 한들, 그게 언제일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도시를 최대한 많이 누려야 한다. 고로 돌발행동은 금지다. 오늘만큼은.
한 도시에서만 일주일을 넘게 있으면 당연히 널널한 여행이 될 줄 알았다. 봤던 장면을 지겹게 눈에 담고, 먹었던 음식도 질리도록 입에 넣을 줄 알았다. 착각을 넘어선 자만이었다. 닿지 못한 런던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나는 그간 부렸던 오만한 여유를 만회하기 위해 마지막 하루를 부지런히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 반드시.
숙소에 짐을 맡기고 나왔다. 공항에 가기 전, 이곳에 다시 들러 캐리어를 가져갈 계획이다. 일정의 마무리를 숙소 근처로 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단 1분도 낭비하지 말자! 나는 시험을 하루 앞둔 아이처럼 조급해졌다. 다급한 마음이 피곤함을 잠시 억누른 걸까. 이상하게도 기운이 쌩쌩했다. 애석하게도 이제야 시차 적응을 마친 모양이다. 진즉에 이럼 얼마나 좋았게.
아침에 메종 베르토에 가서 스콘을 먹고, 주변 소호 거리를 구경하다가, 리젠트파크를 잠시 들른 뒤, 운하를 따라 캠든 마켓으로 가는 거야. 최소 걸음으로 최대 반경을 누리는 최적의 루트.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완벽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최종 목적지인 캠든마켓으로 가기 위해 리젠트 운하를 따라 걸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말고 걸어가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강요 때문이다. 운하가 시작되는 길목에 들어서자 깨달았다. 왜 그들이 그토록 핏대를 세우며 도보이동을 주장했는지를.
길을 따라 심어진 울창한 나무가 우람한 그늘을 만들었다. 햇빛이 내리쬐는데도 덥기는커녕 오히려 쌀쌀하다. 물 위에는 리무진처럼 기다란 배가 줄지어 정박해 있다. 그 안에 살림살이가 있는 게 의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 사람이 사는 공간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주거형태. 런던 집세가 얼마나 비싸면 배에서 사는 걸까. 서울도 곧 이렇게 될까 봐 두려워진다.
도착지였던 캠든마켓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오랜만에 만난 관광객 무리 때문이다. 요 며칠 한적한 런던에 익숙해진 나는 왁자지껄한 소음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어서 여길 벗어나 리젠트 운하로 돌아가자는 생각뿐이었다. 빠른 식사를 위해 그나마 한산한 푸드트럭 앞에 줄을 섰다. 또띠아 랩을 파는 가게였다. 곧장 나온 음식을 받아 들고 인적이 드문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계획보다 마켓에 머무른 시간이 짧았던 덕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남은 일정은 숙소에 들렀다가 공항으로 가는 것뿐이다. 이것을 빌미로 나는 모험을 택했다. 왔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가보기로. 약간 돌아가는 탓에 10분 정도 더 소요되는 경로였다. 이 정도쯤은 감당할 수 있다. 오늘 하루 시간표대로 움직인 나를 위한 포상으로.
나는 숙소까지의 거리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아직은 늦장부릴 틈이 남아있었다. 지금 이 걸음 속도라면 충분했다. 이대로만 가자, 이대로만.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만나고 말았다.
운하 위에 떠 있는 배 한 척. 가판에는 형형색색의 책들이 빼곡하게 꼽혀있다. 그 위로는 연주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악기를 매만진다. 이윽고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발길을 멈췄고, 떠들던 사람들은 대화를 멈췄다. 내 시선과 움직임도 함께 멈춰버렸다.
Word on the Water. 이곳은 배를 개조해서 만든 서점이었다. 어쩜 상호명 라임까지 기가 막힌다. 가게 분위기뿐 아니라 작명 센스마저 내 취향이잖아. 수준급 연주 실력은 또 어떻고. 막귀인 나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공연이었다. 도저히 이 앞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를 밧줄로 포박한 것 같았다.
안절부절, 이만큼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가야 하는데 갈 수 없고, 갈 수 없는데 가야 하는 상황. 내일 다시 오자는, 떠나기 전에 다시 들르자는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당장 공항에 가야 하니 말이다. 식장에 들어서기 직전에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에 발만 동동 굴렀다. 10분은 더 있어도 되지 않을까? 아니 5분은 괜찮을 거야.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여유를 끌어다 쓰기로 했다. ‘영끌’보다 무서운 ‘여끌’이었다.
비행기를 놓치면, 한국을 못 가고, 그럼 출근을 못하고, 그럼… 현실을 떠올리자 바위 같던 발걸음이 돌멩이처럼 가볍게 굴러간다. 음악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가슴은 점점 먹먹해졌다. 왜 하필, 왜 이제야, 왜 내 눈앞에 나타난 거니.
‘떠나기 직전이라 애절했을 거야. 지금은 뭘 봤어도 감동이었을걸. 저 책방이라서 그런 게 아니야.’ 커지는 아쉬움을 달래 보려 괜히 찬물을 끼얹어본다. 그래도 마음이 식지 않는다.
장소라도 기록해 두려고 구글지도를 열었다. 이곳의 평점은 무려 4.8점. 이미 천 개가 넘는 리뷰가 달려있었다. 아름다운 곳이라고,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멋진 공간이라고. 모두가 그곳을 추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견한 후기 한 줄. 한국인이 남긴 듯한 문장. 그 앞에서 내 손이 멈췄다.
런던에 9일간 머무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였습니다.
동일한 여행지에서, 비슷한 기간을 머무르면서, 같은 생각을 한 사람. 떠나는 아쉬움에 착각한 거라며 스스로를 속이던 자작극을 나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감정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행이야. 내게 조금의 여유가 생겨서.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걸어와서. 이 공간을 만나서. 지금 이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런던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