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짐
15kg. 평소보다 유달리 무겁던 캐리어를 체크인 카운터 저울 위에 올려두었을 때. 계기판에 뜬 숫자를 보고 헛웃음이 났다. 그간 나는 짐을 최소화하는 경량식 여행을 추구해 왔는데. 그래서인지 출국할 때는 수화물 무게가 두 자리를 넘어선 적이 없는데. 간혹 동행자들이 돌덩이 같은 가방을 끌고 오면 ‘혹시 이민 가?’라고 농담조로 말하던 나였는데. 그런데 지금, 내 짐이 그들의 것보다 훨씬 묵직해 보인다.
추울 때 펼칠 전기장판, 조깅할 때 입을 운동복, 배고플 때 먹을 간식, 심심할 때 읽을 책, 영화 볼 때 사용할 태블릿 PC. 그밖에 무수한 것들. 지금 보니 필요 없는 물건이 태반이다. 특히나 책은 왜 챙겼는지 모르겠다. 공원 잔디밭에서 한가롭게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꿈꿨지만… 조금도 읽지 않았다.
나는 혼자이기에 생기는 헛헛함을
물건들로 메워보려는 마음이었을까.
여행의 마지막 밤은 매번 전쟁이었다. 며칠새 불어난 짐을 캐리어에 욱여넣다 보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몇몇 물건들을 기내용 가방에 옮겨 담고 나서야 트렁크는 겨우 입을 다물었고, 그 위에 올라앉아 짓눌러야만 지퍼살은 서로 맞물렸다.
이번에는 달랐다. 챙길 것보다 버릴 것이 더 많았다. 짐 정리가 아닌 분리수거에 가까웠다. 부드러운 촉감이 사라진 수건, 팔 안쪽에 보풀이 잔뜩 일어난 가디건, 얼마 남지 않은 샴푸와 바디로션, 해져서 금방이라도 구멍 날 듯한 양말. 전부 다 버렸다. 마치 ‘해외 원정 쓰레기 투기’를 하려고 온 사람처럼.
반대로 채울 것은 없었다. 여행지에서 산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줄 간식, 부모님께 드릴 선물, 언젠가 만날 친구들에게 전달할 기념품, 심지어 나를 위한 무엇도 사지 않았다. 아! 자켓 하나를 사긴 했네. 그런데 이 마저도 날씨가 춥지 않았다면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9kg. 오늘은 히드로 공항에 있는 저울에 캐리어를 올린다. 이번에는 한 자리 숫자가 뜬다. 나는 다시 헛웃음이 난다. 집으로 돌아갈 때, 내 수화물은 두 자리 숫자를 넘지 않은 적이 없다. 짐을 부칠 때마다 허용치를 넘을까 매번 전전긍긍하던 나였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더 가벼워진 가방이라니.
내가 가져온 건 뭐고, 내가 비워낸 건 뭘까. 내가 버린 물건들이 사라진 무게의 전부인가. 인간관계에서 쌓인 응어리, 그로 인해 받은 상처, 그럼에도 답답하게 구는 나 자신. 어쩌면 내 마음의 짐이 더 큰 무게를 차지하진 않았을까.
나는 후련해지기 위해 이곳에 왔다. 도망을 가장한 여행의 주제는 채움이 아닌 ‘비움’이었다. 가방 안에 담긴 쓸모없는 물건들을 빼내면서, 내 안에 담긴 싫증 나는 감정들을 함께 정리했다. 이전 여행에서는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어왔다면, 이번 여행에서는 걸리적거리고 무거운 혹을 떼어내고 온 기분이다.
수화물 무게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벼워진 건 캐리어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