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물 무게가 줄었습니다

마음의 짐

by 양독자


15kg. 평소보다 유달리 무겁던 캐리어를 체크인 카운터 저울 위에 올려두었을 때. 계기판에 뜬 숫자를 보고 헛웃음이 났다. 그간 나는 짐을 최소화하는 경량식 여행을 추구해 왔는데. 그래서인지 출국할 때는 수화물 무게가 두 자리를 넘어선 적이 없는데. 간혹 동행자들이 돌덩이 같은 가방을 끌고 오면 ‘혹시 이민 가?’라고 농담조로 말하던 나였는데. 그런데 지금, 내 짐이 그들의 것보다 훨씬 묵직해 보인다.


추울 때 펼칠 전기장판, 조깅할 때 입을 운동복, 배고플 때 먹을 간식, 심심할 때 읽을 책, 영화 볼 때 사용할 태블릿 PC. 그밖에 무수한 것들. 지금 보니 필요 없는 물건이 태반이다. 특히나 책은 왜 챙겼는지 모르겠다. 공원 잔디밭에서 한가롭게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꿈꿨지만… 조금도 읽지 않았다.


나는 혼자이기에 생기는 헛헛함을

물건들로 메워보려는 마음이었을까.



런던까지 무겁게 가져온 짐





여행의 마지막 밤은 매번 전쟁이었다. 며칠새 불어난 짐을 캐리어에 욱여넣다 보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몇몇 물건들을 기내용 가방에 옮겨 담고 나서야 트렁크는 겨우 입을 다물었고, 그 위에 올라앉아 짓눌러야만 지퍼살은 서로 맞물렸다.


이번에는 달랐다. 챙길 것보다 버릴 것이 더 많았다. 짐 정리가 아닌 분리수거에 가까웠다. 부드러운 촉감이 사라진 수건, 팔 안쪽에 보풀이 잔뜩 일어난 가디건, 얼마 남지 않은 샴푸와 바디로션, 해져서 금방이라도 구멍 날 듯한 양말. 전부 다 버렸다. 마치 ‘해외 원정 쓰레기 투기’를 하려고 온 사람처럼.


반대로 채울 것은 없었다. 여행지에서 산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줄 간식, 부모님께 드릴 선물, 언젠가 만날 친구들에게 전달할 기념품, 심지어 나를 위한 무엇도 사지 않았다. 아! 자켓 하나를 사긴 했네. 그런데 이 마저도 날씨가 춥지 않았다면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9kg. 오늘은 히드로 공항에 있는 저울에 캐리어를 올린다. 이번에는 한 자리 숫자가 뜬다. 나는 다시 헛웃음이 난다. 집으로 돌아갈 때, 내 수화물은 두 자리 숫자를 넘지 않은 적이 없다. 짐을 부칠 때마다 허용치를 넘을까 매번 전전긍긍하던 나였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더 가벼워진 가방이라니.


내가 가져온 건 뭐고, 내가 비워낸 건 뭘까. 내가 버린 물건들이 사라진 무게의 전부인가. 인간관계에서 쌓인 응어리, 그로 인해 받은 상처, 그럼에도 답답하게 구는 나 자신. 어쩌면 내 마음의 짐이 더 큰 무게를 차지하진 않았을까.


나는 후련해지기 위해 이곳에 왔다. 도망을 가장한 여행의 주제는 채움이 아닌 ‘비움’이었다. 가방 안에 담긴 쓸모없는 물건들을 빼내면서, 내 안에 담긴 싫증 나는 감정들을 함께 정리했다. 이전 여행에서는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어왔다면, 이번 여행에서는 걸리적거리고 무거운 혹을 떼어내고 온 기분이다.


수화물 무게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벼워진 건 캐리어만이 아니었다.



안녕, 런던
keyword
양독자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팔로워 281
이전 24화떠나기 직전, 최애 장소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