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일회용 필름카메라

by 양독자


‘남는 건 사진뿐이야’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이 마지막까지 남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그럼… 사진이 제일 소중하다는 거야? 살아 움직이는 풍경보다 멈춰있는 장면이 더 가치 있을 리 없었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오감은 사진보다 오랜 시간 곁에 머물거라 생각했다.


내가 사진의 값어치를 납득한 계기가 있었으니. 일명 ‘핸드폰 잠수이별’ 사건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휴대폰이 하루아침에 먹통이 되었다. 어떠한 전조증상도 없었다. 마지막 작별 인사? 당연히 남기지 않았다. 가장 먼저 아차 싶었던 것은 사진첩. 그간의 여행 기록이 모두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한 마디로… 망했다.


사진이 없이도 충분히 추억할 수 있어! 하지만 시간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호기로운 포부도 사라져 갔다. 그동안 내 기억은 왜곡되기도, 흐려지기도, 아예 증발되기도 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진은 기억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것을. 그 후로 나는 매 여행마다 필사적으로 기억장치를 만들었다. 사진첩, 영상, 블로그 포스팅 등. 형태는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다.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진을 찍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천천히, 애정을 담아, 고민하며 촬영하는 편이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양으로 승부하는 공장형 촬영법은 나와 맞지 않는다. 그렇게 만든 결과물들은 기기에서 삭제되거나,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나는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좋아한다. 이것이 지닌 불편한 이점(?) 때문이다. 일단 촬영 매수가 정해져 있다. 한정된 숫자는 사람을 신중하게 만든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해도 될지. 나중에 더 맘에 드는 풍경이 나오진 않을지. 사진 한 컷에 많은 고민이 깃든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걱정이 필요 없는 기막힌 경치를 만나기도 한다.


또 다른 장점은 결과물을 바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합격여부가 바로 뜨는 인스턴트식 사진과는 다르다. 역광은 아니었는지, 흔들리진 않았는지, 수평은 잘 맞았는지. 모든 게 궁금하지만 당장은 알 수 없다. 사진을 인화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마치 우편으로 받는 손편지 같달까. 느리지만, 아니 느리니까 낭만적이잖아.








내가 구입한 카메라는 코닥 데이라이트. 40매까지 찍을 수 있는 제품이다. 달리말하면 내게는 40번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런던의 다채로운 모습 중 40가지의 순간만 기록할 수 있다. 여행기간이 8일이니까 평균적으로 하루에 5장의 사진이 허락된다. 여행지가 매력적일수록 이 숫자는 작게 느껴질 것이다.


나만의 런던을 담아내기로 했다. 인터넷에 널린 사진. 여행안내책자에 나올 듯한 구도. SNS에 나올 법한 장면. 그런 뻔한 모습은 찍지 말자. 내 사진은 기억을 위한 통로가 되는 게 목적이잖아. 지금의 감정을 느끼고, 순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진을 찍어보자.


드르륵드르륵. 카메라에 달린 톱니바퀴를 두어 번 돌린다. 탕! 장난감 총을 장전하는 소리. 이제 사진을 찍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다. 나는 엄지손톱보다 작은 화면에 눈을 가져다 댄다. 몇 초동안 주저하다가 셔터를 누른다. 딸깍! 사진을 찍을 때마다 계기판에 숫자가 줄어든다. 40, 39,... , 2, 1. 어느덧 마지막 사진이다. 딱 한 발이 남았다. 나는 더 신중해졌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사진을 인화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직접 사진관을 가지 않아도 된다. 현상소에서 택배 접수도 받아준다. 여행 내내 함께한 일회용 카메라를 에어캡에 꽁꽁 싸서 포장했다. 일상에 점차 적응될 즈음, 내가 맛보았던 런던이 다시 찾아왔다. 잘 지내고 있냐고 사진이 말을 걸어온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사진. 생각과 다르게 찍힌 사진. 살짝 삐뚤어진 사진. 내 맘 같지 않은 결과물들이 몇몇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뜻밖의 수확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내가 봤던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멋있게 담긴 장면들이 가득했다.





나는 일회용 카메라가 내 여행과 닮았다고 느낀다. 셔터를 누를 때는 사진이 얼마나 멋지게 나올지 모르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몰랐다. 지금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를. 끝나고 나니 비로소 깨닫게 됐다. 아~ 그때 참 재미있었지.


뒤늦게 받은 필름 사진처럼,

런던의 기쁨이 뒤늦게 상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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