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콘과 홍차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고민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여행의 마지막, 휴가의 마지막, 런던의 마지막. 이 명사에 어울리는 음식은 뭘까. 나는 이번 끼니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 첫인상보다 끝인상이 중요한 것처럼, 여행도 마찬가지니까.
만족스러운 끝맛을 위해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려본다. 런던에 와서 가장 먼저 먹었던 베이글, 푸짐해서 좋았던 피시앤칩스, 예약해 놓고 가지 못했던 미슐랭 식당. 먹어 봤던걸 또 먹을까. 아님 못 먹어본 것을 먹을까.
불현듯 첫날 먹었던 스콘과 홍차가 생각난다. 그날은 무진장 추웠더랬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호호 불어 들이키니 몸이 사르르 녹았는데. 그때가 벌써 오래전 추억 같다. 버터향을 가득 품은 주먹만 한 스콘. 간식 정도로 생각했는데 식사가 된 녀석. 덕분에 여행 시작부터 내 속은 든든했다.
그래, 런던의 처음과 끝은 스콘과 홍차로 하자!
마지막 식사는 영국스러운 무언가여야 한다.
영국은 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아침, 점심, 오후, 저녁에 걸쳐 티타임을 갖는다. 그중 오후에 마시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다. 3단 트레이에 스콘, 샌드위치, 디저트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 이는 영국 귀족들이 시작한 대낮의 사교 문화였다.
하지만 상류층의 문화를 서민들이 따라 하기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지금 여행 중인 내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고. 제대로 된 애프터눈티 세트는 최소 7만 원, 못해도 10만 원 이상이다. 같이 먹을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혼자서 감당 못할 메뉴를 주문하는 건 너무도 아까웠다. 남기는 음식도, 돈도.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크림 티(Cream Tea)'다. 애프터눈 티의 간소화 버전이랄까. 요즘 언어로 '보급형 애프터눈 티'라고 할 수 있겠다. 휘황찬란한 먹거리는 빼고 간단하게 스콘과 홍차만 마시는 것을 말한다. 스콘 한 덩이에도 배고픔이 사라지는 걸 생각하면 굉장한 가성비 식사임에 틀림없다.
영국식 스콘은 한 마디로 '겉바속촉'이다. 겉은 돌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카스텔라처럼 촉촉하다. 한국에서 파는 스콘은 바삭한 편이라 잘게 으스러지는데, 이곳의 스콘은 그렇지 않다. 바삭함보다 눅눅함을 좋아하는 변태 같은 취향을 가진 나는 폭신한 술빵이 생각나는 영국식 스콘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함께 곁들이는 아이템도 특색 있다. 클로티드 크림과 잼이다. 연 노란색 클로티드 크림은 그것만 먹었을 때는 밍밍한 듯 하지만, 희한하게도 과일잼과 만나면 맛이 수직 상승을 한다. 그걸 갓 구워낸 스콘에 바른다? 굳이 설명을 해야 할까 싶다.
맨 먼저 감지하는 맛은 달달한 딸기잼이다. 그다음은 부드러운 클로디드 크림. 마지막으로 푹신하지만 묵직한 스콘의 감촉이 따라온다. 이것은 실패 없는 조합이다.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내 미간은 찌푸려졌다. 화를 내는 건 음식이 맛있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때 홍차 한 모금을 마신다. 쌉싸름한 향기가 자칫 달고 느끼할 수 있는 내용물을 진정시킨다. 워워. 얘들아 우리 갈 길이 멀다. 들뜨지 말고 천천히 가자.
크림과 잼을 바르는 방법도 정해져 있다. 먼저 납작한 원통 모양의 스콘을 반으로 가른다. 한층 더 넓적해진 스콘 조각 위에 클로티드 크림을 넓게 펴 바르고, 그 위에 딸기잼을 살포시 얹는다. 이제 입 안으로 직행!
크림과 잼을 바르는 순서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누군가는 크림을 먼저 잼을 나중에, 또 누군가는 잼을 먼저 크림을 나중에 바른다. 무엇이 정석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크림 먼저 파’와 ‘잼 먼저 파’가 서로 맞다고 주장하는 귀여운 논쟁이 계속될 뿐이다. 이건 마치 탕수육 ‘부먹 파’와 ‘찍먹 파’ 간의 싸움인가.
나는 크림을 먼저 바르고 잼을 위에 올리는 방식으로 스콘을 먹기 시작했다. (TMI인데 탕수육은 부먹파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릇에 넘치도록 크림과 잼을 담아주신다. 먹다가 모자라면 말하라는 인심도 덧붙여서. 사실 나는 따뜻한 빵과 차보다 이곳 사람들의 온기를 마지막으로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외국 음식을 원본보다 잘 만들어내는 대단한 우리나라에 영국식 스콘과 홍차를 파는 곳이 없을리 없다. 하지만 이 따스한 마음도 있을까?
런던 최후의 만찬이 이렇게 끝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