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저녁 식사에 1,250달러를 받는 호손 레스토랑에 12명의 선택 받은 손님들이 도착한다. 외딴섬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펼쳐지는 12명의 손님과 이들에게 요리를 제공하는 셰프 슬로윅(레이프 파인즈)의 이야기를 다루는 <더 메뉴>는 마치 구약 성서의 ‘최후의 만찬’을 떠오르게 만드는 영화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예수의 희생이 강조된 성서 속 성스러운 이야기의 이미지를 빌려온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의 자세로 점점 기괴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제공하며 전방위적인 공격을 가한다.
<더 메뉴>는 영화에 대한 영화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가하는 전방위적인 공격은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향한다. 이 공격은 평론가, 관객, 제작자를 비롯해 하물며 영화를 만드는 현장의 인원들에게까지 미친다. <더 메뉴>가 가지고 있는 이 시니컬한 태도는 블랙 코미디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준다.
셰프의 음식을 통해 영화 혹은 예술관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더 메뉴>는 존 파브로 감독의 2014년 작품인 <아메리칸 셰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두 영화 모두 음식을 통해 영화와 예술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 이야기한다. 두 영화는 시종 밝은 분위기와 그에 대비되는 음울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전체적인 톤에서의 차이와 함께, 결정적으로 음식을 다루는 태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보는 동안 군침을 돌게 만드는 <아메리칸 셰프> 속 음식과 달리, <더 메뉴> 속 음식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이 맛 없어 보이는 음식과 이 음식을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는 이 영화가 비판하고 있는 ‘영화’와 겹친다. 요리 평론가 블룸(자넷 맥티어)은 그녀 앞에 놓인 음식을 두고 장황한 이야기와 해석을 곁들인다. 요리 광 타일러(니콜라스 홀트) 역시 자신의 온갖 지식을 동원해 자신의 동행인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 앞에서 잘난 척을 늘어놓는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요리’를 ‘영화’로 바꾼다면 <더 메뉴>가 공격하는 대상을 발견할 수 있다.
손님들 중 세 명의 젊은 사업가인 소렌(아투로 카스트로)과 브라이스(롭 양), 데이브(마크 세인트 시어)는 레스토랑 주요 투자자와 그들의 친분을 과시하며 슬로윅의 코스에 간섭한다. 그들에게서는 제작자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지나치게 참견하는 제작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호손의 단골이라고 하지만 본인들이 먹은 음식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리브랜트 부부(리드 버니와 주디스 라이트)는 영화를 이용해 지적 허영을 채우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배우인 디아즈(존 레귀자모)는 보이는 그대로 영화배우다. 대신 연기와 작품에는 관심이 없고 돈 되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다. 셰프 슬로윅은 요리를 내놓으면서 자신의 철학을 강요한다. 그는 손님들에게 ‘먹지(Eat) 말고 맛보라(Taste)’고 한다. 그렇게 요리를 즐기는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을 손님들에게서부터 앗아간다. 그는 영화를 보는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을 관객에게서 빼앗는 영화감독이다.
이들 사이에서 마고는 특별하다. 슬로윅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손님들은 결국 자신 앞에 놓은 말도 안 되는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허영을 채운다. 비싼 금액을 들여 은밀하게 마련된 자리에서 그들은 ‘있어 보이는’ 음식을 먹으면서 의미 없는 허영으로 배를 불린다. 그러나 마고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의미 없는 허영으로 자신의 배를 불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슬로윅에게 자신의 허기를 강조하며 그를 자극한다.
마고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이유는 그녀만이 유일하게 허영을 먹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 슬로윅은 흑백 논리를 가지고 진영을 가르는 인물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중반부 그는 마고에게 편을 선택하라고 한다. 슬로윅은 음식을 만드는 자와 음식을 먹는 자(영화를 만드는 자와 영화를 보는 자)로 편을 가른다. 마고는 슬로윅의 편에 서는 듯 보였지만 외부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셰프를 배신한다. 그렇게 그녀는 최후의 만찬을 비튼 이 영화 속 가롯 유다가 된다. 그렇다고 먹는 자들의 편에 서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호손에 있는 이들은 슬로윅이 애써 그어놓은 선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두 똑같이 허영을 쫓는 자들이다. 그들 모두 허영을 쫓느라 눈앞에 있는 음식에 대한 즐거움, 즉 영화에 대한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마고는 극 중에서 계속해서 배고플 수밖에 없다. 허영만을 쫓는 호손에서는 음식을 먹는 본질적인 재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배를 불리는 것은 영화의 후반부다. 환멸을 느끼며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을 준비한 슬로윅 또한 처음 요리를 시작할 때는 즐거움을 느꼈던 시절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싸구려 치즈 버거를 만들던 시절. 그러나 커리어 초기 자신의 자긍심을 그 무엇보다 드높여줬을 가장 가치 있는 치즈 버거를 만들던 시절. 마고는 그 치즈 버거를 요구하며 슬로윅에게 초심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단 한 입만으로 그동안 채우지 못했던 허기를 채우며 허영의 지옥에서 탈출한다.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지은 채 만든 슬로윅의 치즈 버거에는 요리의 본질적인 즐거움이 담겨있다. 온갖 의미를 담은 1,250달러짜리 저녁 식사가 아닌 10달러 남짓의 치즈 버거 세트에서도 요리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도 그렇다.
<더 메뉴>는 영화를 즐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방해하는 인물들을 모두 태워죽이면서 마무리한다. 그 장면을 마고는 햄버거를 먹으며 배 위에서 지켜본다. 본질적인 재미를 음미하면서 불타는 호손을 바라본다. 불타는 호손은 결국 <더 메뉴> 자체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호손을 탈출한 마고는 이 마지막 장면, 즉 <더 메뉴>를 지켜보면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곁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은 그 순간 마고가 된다. 그렇게 이 블랙 코미디는 이 마지막 순간으로 시네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영화의 본질적인 재미를 찾는 유다가 되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