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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로백수 Feb 01. 2022

No Way Home

설날 먹고 난 것들을 설거지하며 한 생각

점심시간이 꽤 지난 오후 1시 45분.

3시간 정도 걸려 도착할 거라는 누나네 가족들은 길이 막혀서인지 예정시간보다 15분이 지나도 아직 도착을 하지 못하고 있고, 누나네가 오면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기다리던 부모님과 저는, 거실에 상을 차려놓고 그들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전 내 저와 어머니의 대화는 거의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설 연휴에 당신을 보러 오시는 자식과 손자들에게 뭐라도 더 차려서 먹이고 싶어 하셨고, 저는 허리 수술을 하신지 얼마 안 되신 어머니가 요리를 하신다고 움직이시는 게 못마땅해서입니다. 맞습니다 '못마땅'!


어머니가 현재 허리 수술 후 회복단계라는 점을 강조하여, 평소 명절에 만들던 여러 가지 음식들을 대거 축소해서 함께 '갈비'와 '잡채'만 하자고, 이번 설날 2주일 전부터 어머니와 합의를 하였건만, 어머니는 기어코 제가 늦잠을 자고 있는 이른 아침에 생선을 굽고, 나물을 무치며 이런저런 음식들을 만들고 계시더군요. 병원에서 19만원 인가 구입한 허리보호대까지 착용하시고 또 양쪽 팔뚝을 싱크대에 밀착하시고는 여러 가지 음식들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순간 열이 받는 겁니다. 병원에선 몇 달 간은 무거운 걸 들거나 오래 서있거나 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도대체 저따위로 할 거면 수술은 왜 하셨을까요...


누나 가족들이 배불리 먹고 돌아간 저녁. 기름기가 많은 명절 음식들을 차리고 담았던 그릇과 접시, 냄비들을 개수대에 쌓아두고 삼십 분 넘게 설거지를 하다 보니, 짜증이 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습니다. 왜 난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날에 아침부터 어머니와 요리를 더하니 마니, 그만 꺼내니 마니 하며 싸우고, 다들 각자의 집으로 떠난 저녁에 이 설거지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명절 음식을 차리고 치우는 프로세스에 참여하기 전에는, 어머니의 헌신과 누이들의 봉사로 제가 배불리 먹고 즐겼던 모든 것들이 진행되었다는 걸. 하지만 지금 제가 이렇게 어머니에게 짜증이 나는 건,  이제와 제가 그들이 했던 수고로움의 일부를 하게 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어머니의 자식사랑의 방식이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 없던 옛날이나 그렇지, 요즘 누가 부모님 댁에 밥을 먹으러 오나요. '명절에만 먹는 음식'이라는 개념이 없어진 요즘, 밥이야 무얼 먹어도 상관없으니 저는 가족들이 전부 건강하고 즐거운 컨디션으로 모여서 인사를 나누게 만드는 것이 요즘 명절 준비의 핵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절대적 노력과 헌신으로 다른 가족들이 배부른 거 말고, 모두가 부담되지 않는 상태에서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는 것 말입니다.


이제 또 무리를 하신 어머니는 아마 한동안 또 허리 때문에 고통을 받으실 거고, 그걸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저나 아버지는 하지 말라는 걸 해놓고 아파하는 어머니를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할 겁니다. 그러면 또 어머니는 가족들을 위한 자신의 마음과 노력을 몰라주는 저나 아버지에게 서운하고 상처를 받으시겠죠. 한 끼 밥을 먹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누이 가족들 말고, 계속 일상을 공유하고 살아야 하는 이 3명의 불편함과 어색함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이고 누구의 잘못일까요?


배달음식으로 푸짐하게 상을 차리고, 각자 생각하는 맛있는 것들을 조금씩 가지고 와, 오랫동안 못 본 얼굴을 보며 서로의 근황을 공유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 흩어지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명절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이룰 수 없는 꿈이려나요. 앞으로 몇 번의 명절을 더 보내겠지만, 그때까지 명절 때마다 제가 사는 지금 이 집이 제가 살아야 하는 집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아 갑자기 남의 집처럼 느껴지는 그런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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