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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Nov 18. 2020

유자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자매간에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시간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 앞에는 커다란 택배 상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 키다리 오빠가 보내준 유자 상자다. 작년에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고 하시더니 천직으로 알고 해오던 일이라 금방 그만두기가 힘드셨나 보다.


상자를 열자마자  샛노란 유자들이 향기를 흩뿌린다. 새콤달콤하면서도 쨍한 찬기를 품은 겨울 향이다. 어느새 그 향기는 부엌에서 거실로 그 영역을 넓힌다. 유자 하나를 손톱으로 꾹 누르자 인정사정 두지 않고 '픽' 하고 물총을 쏘아 댄다. 그 순간 나의  잠들었던 세포들이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유자 서 너 개를 방과 거실 곳곳에 하나씩 둔다. 겨우내 유자는 집안에서 나는 쾌쾌 냄새를 몰아내고 자신의 특유한 향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봄이 겨울을 슬슬 밀어낼  즈음 유자는 쭈글쭈글해지면서 갈색으로 변하는데, 그것으로 유자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갈색 껍질을 까면 연시 같은 노란 속살이 가득해  먹으며, 새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일품이다. 누구도 맛보지 못했을 오랜 경험으로 얻은 맛이다.



내가 처음 유자를 본 것은 초등학교 1학년 겨울로 생각된다. 그때는 유자가 지금처럼 흔한 과일이 아니고  꽤 귀한 몸으로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는 11월 말쯤 선산이 있는 큰댁으로 시제를 지내러 가셨는데,  그때마다 지푸라기로 만든 긴 꾸러미 두 개를 가져오셨다. 그 꾸러미 안에는 떡, 유과와 과일 등 제사 음식이 들어 있었는데  우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새콤달콤 사과와 유자였다. 그중에서도 유자는 귀한 만큼 인기 있었고  서로 가지려고 해 경쟁이 치열했다.




 어느 해 운 좋게도 유자는 내가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유자는 너무 신맛이 강해 그냥 먹기가  힘든 과일이다. 그래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거나  향을 즐기면서 갈색이 되도록 기다려야 했다. 비록 내가 원하는 과일은 손에 넣었으나 당장 먹을 수가 없으니 빛 좋은 개살구였다. 이때부터 슬슬 내 관심은 언니가 아끼며 먹지 않고 있는 윤기가 반질반질 나는 겉이 붉은 과일이었다. 먹고 싶어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한입 얻어먹으려면 언니가 그 과일을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니는 그것을  아끼느라 도통 먹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밤이 깊었고 모두 잠이 들었다.  붉은 사과가 여전히 언니 품에 안겨 있었다. 슬며시 다가가 그것을 빼내는 데 성공한 나는 마루로 나가 한 입 힘껏 깨물었다. 입안은 금세 새콤달콤한 맛으로 가득 찼다. 세상에 이런 맛이 또 있을까. 무릉도원에서 가져온 과일임이 분명했다.  한입,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또 한 입, 한 입만 먹겠다던  그 생각은 우주 어느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어느새  과일은 까만 씨를 드러낸 채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었다.


그다음 날 아침 엄마한테 호되게 혼이 난 나는  유자도  빼앗긴 채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가만히 오더니 유자를 손에 쥐여주며 등을 토닥여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언니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부족한 부분을 한없이 감싸주고 채워  주었던 언니가 옆에 있어서 지금에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커다란 함지박에 넣고 북북 씻어 놓은 유자를 얇게 저민다. 내 손길에 따라 얇게 저민 유자가 도마 위에 수북하다.  유자 사이사이에 설탕을 넣으면 맛있는 유자차 완성이다. 완성된 유자차가 하나, 둘, 셋, 넷, 양평 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 언니,  유자차 만들었는데 일요일에 가지고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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