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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Dec 06. 2020

두 집 살림을 하는 남자

짬이 날 때 읽는 단편소설


영애는 다른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침대 옆에 놓인 시계는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올려 잠을 다시 청해 보지만 잠은 멀리 달아난 지 이미 오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영화에서나 봤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이 사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101동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올라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든 그녀였다.



영애는 아파트 단지를 돌며 요구르트 배달을 하고 있다. 올해로 벌써 10년째다. 영애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그래서 그녀를 찾는 고객들도  많았으며 아파트 단지에서는  영애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얼마 안 된 월급이지만  두 아이 기르며 작년에는 작은 아파트도  마련했다. 힘들지만 힘든지 모르고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그녀였다.


그날도 영애는 스쿠터를 타고 가을바람을 가르며 요구르트를 배달하고 있었다. 동마다 돌며 아기가 있는 곳은 벨을 누르지 않고 문고리에다 걸거나 걸려있는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할머니, 식사하셨어요. 날씨가 찬데 난방은 잘 되죠?"


가끔 노부부만 살고 있는 집은 일부러 벨을 눌러 안부를 묻기도 했다. 101동을 끝내고 117동을 배달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에는 아이가 있어 벨을 누르지 않고  문고리에 걸어 놓고 나오는 집이었는데  웬일인지 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다.



" 계세요. 요구르트 아줌마예요."

그냥 가려다  밀린 수금도 할 겸 노크를 한 것이다.


"네! 잠깐만 들어오시겠어요."

안으로 들어가자 커피 한잔하고 가라며 붙든다. 젊은 사람답게 집안이  제법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현관에서 마주 보는 곳에는 아담한 그림이, 거실 중앙 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가족사진을 본 순간 영애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커피 잔을 땅에 떨어뜨릴 뻔했다.


'어쩌면 저렇게 친한 동생 라희 남편과 닮았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남편분이 혹시 쌍둥이냐고 물었다.


" 아니요. 우리 남편은 여자 형제만 있어요" 하면 웃는다.

커피를 마시고 나오며 영애는 자신이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날 일은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101동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117동에서 사진으로 본 똑같은 사람이 내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라희와 손을 잡고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날 영애는 착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분명 117동 그 여자 남편, 아니 친한 동생 남편이었다.


'오 마이 갓, 세상에 이런 일이'

그녀는 가슴이 뛰고 숨을 쉴 수가 없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에 벌이지고 있는 사실이 제발 꿈이기를 그녀가 믿는 신에게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동생 라희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지 그것이 더 걱정이었다. 어제저녁에도 남편이 출장 갔다 오면서 스카프를 사 왔다며 자랑하던 그녀였다.


"이야, 나도 남자지만 진짜 몹쓸 놈이네."

남편은 곯은 상처는 언젠가는 터지게 되어 있다며 시간을  두고 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해하는 라희를 보며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흔들렸다.


'그래  묻어 두고 가는 거야. 아니야, 속고 사는 두 사람이 불쌍해서 안돼.'

머릿속을 수만 가지 생각들이 헤집고 다녔으며 가슴은 무언가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아무에게도 말을 하면 안 되는 비밀을 가진 임금님 담당 이발사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 대고 외쳤다는 동화가 생각났다.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간직한다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 영애 언니, 경찰서에서 전화 왔는데 남편이 교통사고가 하반신이 마비될지도 모른대. 언니, 너무 무서워. 같이 가 줄래요."


영애와 라희는 택시를 타고 급히 경찰이 가르쳐 준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에는 이미 117동 여자가 눈물이 뒤범벅이 된 채  앉아 있었다.


"여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무것도 모른 라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남편 손을 잡고 울먹였다.


그때 경찰이 병실로 들어오더니


"어느 분이 이분 아내분이신가요? 스마트폰 연락처에 ' 마눌님'하고 두 분이나 기록이 되어 있어서."

그날 이후 그 병실에서는 라희도,  간간이 보이던 117동 여자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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