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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Jan 23. 2021

불법광고는 정말 불법광고일까

-불법광고가 희망의 다리가 된 이야기-

우리 동네 전철역으로 가는 사거리에는 뭔가를 알리고 싶어 하는 욕망들로 가득하다. 요즘은 코로나 예방수칙에 관한 소식이 주류를 이루지만, 자신의 정치적인 치적(治績)을 알리려는 정치인의 현수막은 물상업적인 광고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부지런히 제거를 하지만 수적으로 역부족인 듯싶다. 가끔 휴지처럼 붙어 있는 광고들을 볼 때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눈여겨볼까, 괜한 헛수고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상하게 그 많은 광고지 중 한 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구인광고도 그렇다고 늘 배우고 싶어 했던 중국어 광고도 아닌 뜻밖에 "사람을 찾아 줍니다."라는 자그만 광고지이다.


어느 순간 길바닥에 하얗게 붙어 있는 그 광고지가,  휴지처럼  붙어 간신이 숨을 쉬고 있는 광고지가, 첫사랑 연인을 만난 것처럼 이상하게 나를 가슴이 뛰고 설레게 만들었다. 아마도 늘 가슴 한쪽에 간직한 그 친구가 떠올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선희야! 너는 나를 얼마만큼 아니?"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느닷없이 묻는 질문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받아넘겼던 그 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그날이 그녀와 마지막 만남이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아이들의 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어느 봄날이었다. 학교에서는 신학기가 시작되면 교실 환경정리를 하는데 그날 나를 비롯해 몇몇 엄마들이 선생님 부탁으로 환경 도우미로 참석을 했다.


"어머머, 저 엄마 좀 봐. 액 서리로 몸을 칭칭 감았네 감았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그녀의 범상치 않는 등장에 여기저기서 엄마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수군거렸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교실 꾸미는 작업이 시작되자, 서글서글한 인상에 그녀는 무엇이든지 척척 해내며, 마치 요술을 부리듯 교실을 꾸며 나갔다. 한지로 만든 우아한 창문 커튼, 알록달록 예쁜 우리들의 소식란, 한 학년 동안 빛바랜 낡은 교실 안은 어느새 그녀의 손끝에서 화사한 봄처럼 새롭게 피어났다.     


환경정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같은 방향이라 나란히 가고 있었지만 어색해서 묵묵히 걷고 있는데 그녀가 "우리 커피 한잔 할래요. 한다." 우리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날 이후 친구가 됐다.     


집이 가까운 우리는 어디든 붙어 다녔으며 뭐든지 같이 나누고 함께 했다. 다만 즐기는 취향만은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지긋이 눈을 감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비가 내리는 날은 동동주를, 눈이 오는 날 소주를 마시며 그 분위기를 즐기기는 반면 나는 책을 좋아하고 영화 보는 것을 즐겼다. 서로의 취향이 달라도 희한하게 우리는 마음만은 잘 통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그녀가 말없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날도 우리는 어김없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즐겼고 그러는 사이 뭔가를 이야기를 할 듯하면서 머뭇거리다 끝내 아무 말없이 그녀는 돌아갔다. 언제나 무슨 일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내게 이야기하던 그녀였는데 그날은 의외였다. 그날 이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의 만남은 뜸해졌고 가끔 만난 그녀는 부쩍 말수가 줄고 얼굴은 그늘이 져 있었다.


"선희 엄마, 704동 엄마 이야기 들었어? 그 집 남편이 회사에서 젊은 여사원과 바람이 났대. 글쎄."


 항간에는 이렇게 남편의 사업이 망했다느니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났다느니 하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해져 갔다.


급기야 그녀는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빚쟁이가 야반도주라도 하듯 부랴부랴 살던 곳을 떠났다. 그녀를 태운 차는 눈 위에 선명한 바퀴 자국을 내며 떠났고 눈은 그녀의 모든 것을 지우려는 듯 소리 없이 그 자국을 지웠다. 이제 그녀가 떠난 빈자리에는 나와 그녀가 쌓아왔던 수많은 시간과 추억들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의문인 것은 살던 곳을 쫓기듯 떠나면서 그녀가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가정을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녀와 보냈던 소중한 순간들과 그녀를 지켜 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터진 봇물처럼 와락 내 가슴으로 밀려와 쓰리게 한다. 친구가 힘들어할 때도 괴롭다고 하소연할 때도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일밖에 하지 못했던 나였기에 한없이 나약한 나 자신을 원망하며 괴로워했던 날들이 많았다.


어제 찍었던 광고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남편은 불법 광고는 위험하다며 허가를 받아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는 곳을 찾아가 의뢰를 하자고 한다. 남편 말대로 이 광고지에 나온 “사람을 찾아 줍니다.”라는 광고는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는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고 싶어 하면서도 가슴에만 담고 있던 나에게 만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 바로 이 광고지이기에 더없이 고마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어젯밤에는 생전 꿈에도 나타나지 않던 그녀가 꿈에 보였다. 흐릿한 모습이지만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친구, 잘 사고 있는 거지. 코로나가 끝나는 날 내가 찾아갈게. 반겨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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