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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Nov 02. 2020

        가을 우체통 앞에서            

추억을 느끼는 시간  

가을색이 골 따라 물결치는 산비탈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듣는다. 가을과 짝을 이룬 음악이 가슴속에 잔잔히 스민다. 자잘한 투명 전구가 걸쳐 있는 테라스 빨간 우체통 위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가만히 내려앉아 가을편지를 쓴다.  추억 속에 소녀도 편지를 쓴다. 부산역 어디선가 소녀를 기다렸을 소년에게 쓴다. 받는 이도 없고 주소도 없다.


 소녀는 라디오를 즐겨 들었다. 논둑길을 걸을 때도 소 꼴을 먹일 때도 라디오는 늘 그녀의 벗이었다. 어느 날 소녀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부산에 살고 있는 중학교를 다니는 남학생이  친구들과 펜팔을 하고 싶다 사연을 듣게 된다. 며칠을 망설이다 편지를 보냈는데, 뜻밖에도 그 소년에게 답장이 왔다.


편지에는 간단한 신상 소개와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함께 들어 있었고, 여건만 되면 편지로 친구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소녀는 설렜다. 글씨체도 매너 있는 글도 더구나  동경하는 잘생긴 도시 남학생이 아닌가. 그날부터 둘 사이에 편지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한 달에 서너 통은 기본이었고 7통 가까이  받을 때도 있었다.  소년은 편지를 쓸 때마다  부산의 명소와 읽은 책을 주로 편지에 썼으며 가끔 학교생활도 써서 보냈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공부는 물론이고 못하는 운동이 없는 운동 마니아인 듯싶었다. 특히 소녀가 좋아하며 푹 빠져 있는 야구를 소년도 좋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구단 선수들의 성적과 이름은 물론이요  다른 구단 선수들 성적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녀는 그가 보내는 편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편지가 늦어지면 대문 밖을 서성이며 기다리기도 했다. 은근히 그의 편지는 읽는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마력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해박한 야구지식은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앞둔 겨울방학 때, 소년이 부산 구경을 시켜 주고 싶다는 편지가 왔다. 소녀는 망설였다. 솔직히 편지로 사연만 주고받았을 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겠느냐고 묻는 편지가 몇 차례 더 올 때까지도 여전히 소녀는 망설였다.


 더구나 부모님께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 불벼락은 물론이고 편지마저 못 쓰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며칠을 망설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소녀는 부산역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 그동안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닌 듯싶었고 잠깐 만난 것은 괜찮을 듯싶어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만나자고 하는 날이 되자 그녀는 겁이 더럭 났다. 신문에서 본 여자 납치 사건도 눈에 아른거렸고 무엇보다도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그가 남자라는 사실이 더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그날,  소녀는 부산에 가지 않았다. 그 후로도 소년에게  편지가 몇 번 왔으나 소녀는 답장을 하지 않았고 소년에게서도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지금도 그녀의 비밀 보관함에는 아직도 빛바랜 몇 장의 편지가 남아 있다.  가끔 그 편지를 꺼 볼 때도 오늘처럼 우체통을 만나는 날도  풋 능금처럼  상큼했던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소년에게  편지를 쓴다.


약속 못 지켜 미안했노라고, 한없이 어설픈 그 시절, 네가 있어서  행복했고 그래서  그 시절이  더 빛나고 아름다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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