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잉위잉 Mar 28. 2016

정신적 왼손잡이 #11. 미워하기

151102. #11. 미워하기

내 직무 책임이 적은 것도 있겠지만, 6시 정시 퇴근을 하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다. 집에 앉아서 이래저래 소일하다가 시계를 봐도 9시도 채 되지 않는다. 친구들이라도 만날까 싶어 연락을 돌린 적도 있다. 하지만 대학 동기들은 대학원생들이 많다. 야간수업이나 과외, 아르바이트로 바쁘다. 후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배들은 내가 만나도 할 이야기가 없다. 즉, '9시부터 6시까지 일한다'는 규칙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래 앉아있기 때문에 어깨가 결리고 다리가 잘 붓는다. 태블릿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스트레칭이나 운동을 하기도 하고, 누워서 만화를 보기도 한다. 책장에 먼지 쌓인 책들도 읽어본다. 그러다 보면 10시가 된다. 


#1. 마의 10시 


10시가 넘어간다. 10시쯤 저녁 약을 먹는다. 저녁 약에는 두통을 완화하는 약과 신경 안정제가 들어있다. 기분 탓인지 실제 약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10시에 약을 먹으면 12시를 전후해서 잠이 든다. 약을 삼키고 가만히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는다. 전기장판을 트니 더없이 아늑해진다. 이대로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언제부턴가 10시가 되면, 잠들기 전까지가 너무 괴롭다. 처음 괴로웠던 건 기억과 마음이었고, 나중엔 먹은 저녁밥도 역류한다. 다음 날 아침엔 목구멍부터 명치까지가 불에 타는 것처럼 쓰리다. 10시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 딱히 재밌진 않지만 쉴 새 없이 만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중고 만화책도 사서 책 비닐을 갈아 끼는 일로 소일한 적도 있다. 그림을 다시 그릴 요량으로 서랍에서 화구도 꺼냈다. 잘 되지 않는다. 


이것도 나의 수많은 '그림자'중에 하나겠지,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모습이 더 나타난다 해도 놀랍지도 않다. 뭐, 더 괴로울 수밖에. 그런데 해도 너무한다는 억울함이 밀려왔다. 회사에서 칭찬을 받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생활이 규칙적으로 변하고, 돈을 벌고 있다. 조금씩 어떻게든 나아지려는데 왜 하필 지금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내가 나를 붙잡고 있는 건지. 억울하다. 괴롭다. 괴롭다는 표현을 자주 되뇐다.



#2. 소용없는 원망


의미 없다는 것을 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줄도 안다. 과거의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10시만 되면 그걸 새카맣게 잊고 예전의 악몽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느냐는 말이다.


지난날, 지난날 만난 사람들에 대한 원망.

내가, 당신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건데.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당신은 날 괴롭혀놓고도 지금 잘 살고 있겠지. 

실제로 잘 살고 있지. 아주 잘. 날 기억하기나 해?


불공평해.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알려주기라도 하고 괴롭히라고.

고통스럽고 초라하고 아프고 힘들어서 정말 무너지기 직전인데.

날 이렇게 만든 사람, 날 괴롭힌 사람은 나쁜 사람이잖아.

왜 나쁜 사람이 나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건지 알려주기라도 하라고.



#3. 그랬었는데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면 잠깐 시선을 천장에 붙일 수가 있다. 6평짜리 작고 더러운 방에서, 회색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나. 꼴 보기 싫은 모습. 단 하나도 내 맘에 들지 않는 모습을 한 나. 발버둥 쳤지만, 끝내 나가떨어져버린 나. 


뭐든 잘 될 것 같았던 시점이 분명 있었다. 그게 2015년 초. 대학교를 졸업했다. 제일 건강한 몸무게와 좋은 습관을 갖고 있었다. 머리도 총명했고, 자신감도 지금보단 꽤 높았다. 조금은 세상을 긍정할 수 있을 만큼의 기쁨도 있었다. 사회인이라는 부담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차도가 좋았으므로 2014년 여름부터 해 오던 1차 치료를 그쯤 갈무리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래, 그때만 해도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되는 것만 같았다.

새 직장에서의 생활이, 한꺼번에 엉망진창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히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내가 하기로 계약했던 일도 아니다. 이 급여를 받고 할 만한 일도 아니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외려 현재 취업상태라는 것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거란 생각이 들만큼, 그 업무 자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식습관은 불량해졌고, 과민해진 탓에 소화도 수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사람이 되어갔다. 섭식장애가 다시 찾아왔다. 의사는 깜짝 놀라 약을 다시 증량했다. 


5월이 되어서야 사직서를 냈다. 5개월 동안 모든 걸 잃었다. 그 무렵에 사랑했던 사람도 떠났다. 건강했던 몸도 습관도 생각도 자신감도 잃었다. 자존심과 긍지도 모두 한 번에 짓밟혔다. 1년 가까이 먹었던 약도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그리고 5월의 마지막 진료 날, 의사는 조심스럽게 정신건강의학과로 의과를 옮겨가 볼 것을 권유했다.



#4. 저주 


무겁고 끔찍했던 여름으로 회상이 넘어오면 그때부턴 편두통이 느껴진다. 그때 그 일만 없었다면,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내가 그 사람과 일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차라리 그때 이렇게 할 걸.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원망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난 근로자로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당신을 돕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믿었다. 날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내 노력을 조금이라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 난 잘못이 없다. 이건 당신 때문이다.

당신이 내 모든 걸 빼앗아갔다. 당신이 잘못했다. 당신은 나쁜 사람이다. 날 이렇게 괴롭게 만든 건 당신이다. 내가 나쁘고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나빴다. 당신 때문이다.


이쯤 생각이 다다르면, 그 원망의 대상들이 꿈에 나오기 시작한다. 더 슬픈 건, 꿈에서조차도 나는 도망치거나, 되려 그 사람들에게 모욕의 말을 듣거나, 맞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보통 피하거나 도망가는 내용의 꿈이 많았다. 지금도 난 일했던 장소에 가는 것을 꺼린다.)


"실컷 괴롭혀놓고 이제 와서 챙겨주는 척하지 마. 내 고통을 당신이 알 리도 없잖아. 별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잖아? 착한 사람인 척하고 싶어서 날 이용하는 거지?"


 그렇게 누군가를 밀쳐내고, 뺨을 맞고 잠에서 깨어난다.


 '기분 좋은 아침? 엿이나 먹으라지.'라고 생각한 지는 오래되었다. 출근을 준비하면서 그 사람들을 마음껏 괴롭히는 상상을 했다.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고통을 주고, 소중한 것을 빼앗는 상상. 그런 상상을 하는 내 모습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출근길엔 한동안 땅을 보고 걸었다. 출근 후엔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그 전까진 마음껏 머릿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상상을 즐겼다. 꽤 악취미라고 생각했다. 



#5. 어차피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정말 끔찍하게, 나보다 몇 천배는 아프고, 소중한 걸 잃으면서 괴로워하다가 죽었으면. 내 앞에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벌벌 떨며 무릎 꿇고 빌었으면 좋겠어요."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녀에게 말하면서 상상했다. 예전 직장의 상사가, 날 괴롭게 했던 지나간 연인, 마주쳤던 수많은 '나를 망친 사람들'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나는 웃고 있었다. 두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손 끝의 각질을 뜯어내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 


"그들이 없었어도 다른 뭔가가 당신을 필연적으로 힘들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다시 지금처럼 아프기 시작했을 거예요."


"......"


"미워하는 일도 힘든 거예요. 지금 힘들어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쓸 에너지도 겨우 짜내고 있으니까. 위잉씨 스스로가 이미 미워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그렇게 미워해도 아무것도 해소가 되질 않는 것도 아니까 그럴 거예요. 그런 생각을 계속하는 것도 술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어떻게든 힘든 일은 닥쳤을 것이고, 그때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는 결국엔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허무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대단히 놀랐다. 

피 튀기는 상상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