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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잉위잉 May 15. 2016

정신적 왼손잡이 #23.서로가 서로에게

20160422. 서로가 서로에게

#1. 단골


대학을 졸업하고 이사했다. 그렇게 도착한 이곳에 산 지 1년이 넘어간다. 이전에 살던 곳보다 아파트를 비롯한 주거단지가 많이 형성된 곳이라 교복 입은 학생들도 심심찮게 본다. 그래서 그런지 가게 점원도 잘 바뀌지 않는다. 얼굴이 익은 사람도 꽤 있다. 서로 말하진 않지만. 어느 시간대에 가면 그 사람이 있다고 알만큼 단골인 집도 있다. 나는 보통 속으로 생각만 하는 편이다. 인정을 베푸는 건 보통 반대쪽이다. 


횡단보도 근처의 와플 가게를 하는 사장님과는 면식부터 인사까지 모두 텄다. 내가 어쩌다 말을 꺼냈는진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오는 손님에게 모두 '안녕하세요'라고 크게 인사를 했다.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런 활발한 모습과 변함없이 맛있고 큰 와플 덕에 단골이 꽤 많은 듯했다. 나이는 한 30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빙글빙글 웃는다'는 말이 잘 어울린다. 


내가 행정 인턴으로 일할 땐 내게 '오, 조교님!'이라고 불러줬다. 지금의 회사를 다니며 어쩌다 사원증을 메고 퇴근한 날부터 '기자님'이라고 불러줬다. 그럴 때마다 난 '계약직인데 무슨 기자님이에요. 말도 안돼요.' 라고 그의 친절한 호명을 밀어내곤 했다. 그러면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와플이 구워지는 동안 반조각 짜리 와플에 생크림을 쓱 발라서 '요건 서비스, 기다리는 동안 드셔요'라며 내밀었다.  

친절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아주 기분이 가라앉은 날엔, 그의 가게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일부러 피해가기도 했다. 그의 친절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2. 인형


  집 근처엔 상가가 많은 번화가가 조성되어 있는데, 매번 새로운 가게가 생겼다가 없어지다를 반복하던 자리에 오락실이 생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형뽑기 기계(크레인 게임)만 10대 정도 들어와 있는 인형 가게다. 크레인 게임은 아무래도 돈은 돈대로 쓰고 결과물은 없을 가능성이 높아서 잘 하지 않는다. 근데 정말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인형이 있어서 발길이 이끌렸다. 

  곰인형. 곰인형의 머리를 잘 겨냥해서 크레인으로 움켜잡으면 될 것 같았다. 1회에 천 원. 오락실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잔돈이 꽤 많이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게임 기계 앞에 섰다. 크레인은 곰인형의 머리와 목을 움켜 잡았다. 자, 그대로 들어올리기만 하면 돼. 꽤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옳지. 자 그대로 끌어올려. 인형은 힘없이 미끄러졌다. 허전한 크레인이 흔들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왔다. 천 원은 그렇게 날아갔다. 너무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됐는데.


"여기서 뭐하세요?"


누가 내 어깨를 두드리기에 놀라 돌아봤다. 이 동네에서 날 알아볼 사람은 많지 않다. 근처에 동료 팀원이 살지만 일 외엔 사적으로 만난 적 없다. 머리를 염색한 이후로 대학 동창들도 날 잘 알아보지 못한다. 누구지.


"기자님, 퇴근하셨나 봐요."


와플가게 사장님이었다. 늘 입는 검은 색깔 저지에 스냅백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 날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해 주신 거구나. 어색하게 '안녕하세요'라고 응답했다. 


-인형 좋아하세요?

네. 인형이 예뻐서.

-뭐 뽑으려고 했어요?

곰인형요.

-은근 이게 승부욕이 생겨서, 금세 돈 날려요. 사행성이야, 사행성.

그렇더라고요. 

- 많이 아쉬웠나 봐요.

에에, 좀... 여긴 웬일이세요.

- 오늘은 장사 안 해서, 이 근처 사는데 그냥 놀러 나왔어요.

아.


오락실에서 나와 큰길까지는 한 20 발자국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딱 이 정도의 대화만 나누고,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사장님도 내게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언제나 웃으면서. 

 어떤 날, 결국엔 그 곰인형을 한 번에 뽑았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건드려놔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꼴이긴 했지만. 인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3. 그 어려운 걸 제가 자꾸 해봅니다.


그리고 이틀인가 사흘 뒤, 퇴근길이었다. 와플가게에 불이 켜져 있다. 굳이 뭔가를 먹고 싶진 않았지만 그 가게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인형 뽑으러 갔어요?"


기억하고 계셨구나. 문득 든 생각이, 그날 곰인형을 뽑지 못해서 발을 굴렀던 내 모습이 '무지무지하게 아쉬운 표정'이었나 보다... 역시 내 얼굴은 절대로 내 기분을 숨기지 못한다. 주변에 기다리는 다른 손님은 없어서 사담을 좀 나누기로 했다.


원래 오락실도 좋아하고, 인형도 좋아해요. 자주 가요. 

- 오, 이 근처엔 오락실 별로 없는데, 어디 가요?

퇴근하면 대학로 근처에 놀러 가요.

- 그렇구나!

네. 


...... 저 그때 그 곰인형, 뽑았어요. 

- 오오! 몇 번만에 뽑았어요?

한 번만에.

- 이야, 운 좋네. 다음엔 로또도 하나 사요.

워, 원래 게임 좋아해요. 컴퓨터 게임도 좋아하고.

- 스트레스 풀기엔 좋죠! 

게임도 좋아하고, 마, 만화도 많이 봐요.

- 조용해 보였는데 의외로 활동적이시네요! 만화도 좋죠!


그 무렵 와플이 다 구워졌다. 사장님은 옆의 점원에게 '이 분은 단골이셔. 토핑 팍팍 올려드려.'라고 말했다. 미어터질 것 같은 와플을 받아 들고 인사를 했다. 사장님은 '다음에 또 봐요. 잘가요.'라는 말을 늘 잊지 않았다. 


#4. 환영하오, 낯선 이여.


말하고 싶었다, 그냥. 이런 얘길 한다고 와플 가게 사장님과 내가 각별한 사이가 될 것도 아니고, 친절한 이웃의 인사를 언제까지고 쳐내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가게를 쉬었다던 그날 날 못 본 체 하고 지나갔어도, 내가 먼저 그를 아는 척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 저 사람 저기 있네.'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도 구태여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풀 죽어있는 나에게 말을 건넨 건 - 대화에는 별 의미가 없지만 어쨌거나 친절함과 호의에서 시작된 거니까.  

언젠가 다른 활동 중에 악성 댓글을 받았다. 너무 수위가 높아서 화를 참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나랑 일면식도 없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모르니까 막말을 하지'라는 답을 들은 적 있다. 


내 기준에서의 상식이란, 아는 사람일수록 조심하고, 모르는 사람일수록 더 조심한다. 최근에는 의심에 기반해 둘 다 많이 조심한다. 최근엔 이상하게도, 낯선 사람에게 친절해진다. 와플가게 사장님 뿐 아니다. 다른 활동에서의 사람들도 관심사와 취미가 같아서 친근하게 어울리고 있다. 실제로 만난다면 난 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겠다고 다짐한다.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 것 아닌 사이'라서일까? 내가 이 동네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 보지 못할 사람이다. 내가 그 가게에 와플을 사 먹으러 가지 않으면 여간해선 마주칠 일도 없다. 인터넷의 인연도 내가 그 SNS를 탈퇴하면 다시 인연이 닿을 리 없을지도 모른다. 만나는 그 순간에만 친절하면,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집에 나 말고 또 다른 '살아있는 것'이 있다는 묘한 기분. 이것도 타인일까.

그럼 난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서 애를 쓰고 있나? 내 최선과 최대치를 내주면서 살았지만 끝까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즉 결국 털어놓는 이야기의 범주가 조금 다를 뿐, 난 아무에게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친한 사람을 대하는 만큼 낯선 사람을 대하고 있을 뿐이다.(물론 경계가 어느 정도 허물어졌다는 전제 하에.) 가족을 제외하고, 내게 각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론은 이것.  

타인, 인간을 향한 지독한 의심과 방어, 경계 끝에서.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될 대로 돼라지'라고 맥이 풀려버린 거라고.



구독해주시는 분들이 100명이나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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