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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Nov 27. 2017

너는 너에게, 그 순간 가장 뜨거운 존재였을 테니

영화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라는 질문은 결코 가볍고 쉬운 질문이 아니다. 나는 살면서 저와 비슷한 질문을 쉽게 들어본 적도, 쉽게 물었던 적도 없다.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들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각 사람의 답변이 서로에게 그리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딱히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서일까. (물론 가볍게 던지기에는 너무나도 철학적이고 부담스러운 질문이라는 게 가장 정답에 가깝겠지만 그냥 주절거려봤다. 나는야 답정녀)

 
하지만 반대로 “이상형”에 대해서는 참 쉽게 묻는다. 내 경우, 그런 질문을 받으면 잠깐동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뒤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대개 질문을 던지는 상대들은 끈질긴 성향의 사람들이었고, “왜, 그래도 이런 사람은 안 될 것 같다 싶은 거라도 없어?”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대화가 오고 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머릿 속으로 이상형의 얼굴을 곰곰 그려본다. “-했으면 좋겠다”는 소원과 희망으로 맺어지는 이상형의 모습은 성격부터 외양까지 내 취향에 맞는 완벽한 형태로 그려진다. 
 
이상형은 독일어로 Traummann/Frau다. Traum이 꿈이고 Mann/Frau가 남자/여자를 의미하니 직역하면 "꿈의 남자/여자"정도가 되겠다. 말 그대로 꿈의 사람. 꿈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공존할 수 없듯 꿈처럼 완벽한 사람이 현실 세상에 과연 존재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 있다손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그녀 역시도 나를 과연 사랑해줄까?
꿈처럼 완벽한 존재의 그/그녀를 나는 정말 진정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나의 이상형에 가까웠어요”라는 자기 고백이 흔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상형의 일치, 불일치의 여부를 떠나서) 사랑의 감정은 논리보다는 직관에, 이성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행위다. 언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 이외의 것이랄까. 사랑에 반하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따위에 마음이 '홀린 것 같이 쏠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랑은 마법처럼, 묘약처럼, 불가해한 회로 속에서 전율을 만들어 사람을 홀린다. 


영화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스틸컷


조제와 츠네오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들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을까', '그들의 사랑은 어떤 의미였을까' 따위의 질문은 생각보다 무의미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이유를 구태여 찾아 설명하는 것만큼 사랑의 성질에 반反하는 일은 또 없을 테니까. 그들은 여느 남녀가 사랑에 빠지듯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홀렸다. 그들 사랑에는 그 어떤 계산도, 논리도, 이유도 없다. 조제는 츠네오에게, 츠네오는 조제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그 때 그 순간 가장 거대하고 뜨거운 존재였을 뿐. 


영화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스틸컷


제목부터 추상적인 메타포가 잔뜩 들어 있는 영화,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갖은 단어 속에 담긴 그들의 조각을 훑어보다가 약간의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때때로 영화와 사랑은 한꺼풀 한꺼풀을 읽어내는 것보다 흘러가는대로 지켜볼 때가 훨씬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를 단순한 기표로만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인 접근이었다. 관객 저마다 각자의 의미와 각자의 추억으로 그 기의가 채워지면 그만인 것들. 그들의 이야기에 흘러가듯 전염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약간의 거리를 둔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기적을 증명할 수는 없다.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기적인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기적을 애써 설명하려 들 때
우리는 기적의 희망을 잃어버린다.

여기서 '기적'의 단어를 '사랑'으로 치환해도 문맥은 자연스럽다. 사랑은 말 그대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니까, 사랑을 애써 설명하려 들 때 사랑은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최대한 가만히 놓아 두기로 다짐했다. 다만 조제나 츠네오의 것이 아닌, 나의 호랑이와 나의 물고기와 나의 조제는 어떤 의미인지 조그맣고 조심스럽게 헤아려 볼 뿐.


영화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스틸컷


처음부터 끝까지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은 덤덤하다. 황홀한 묘약이 순간의 짜릿함을 주기는 하지만, 절대 영원한 짜릿한 기분을 약속해 줄 수는 없는 것처럼, 조제와 츠네오는 그들의 사랑 역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때로 한계성은 그 대상을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 역시 그랬다. 두 사람의 순간은 가장 뜨거웠고 찬란했고, 진실했다. 그리고 그만큼 덤덤했다.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사랑의 끝자락을 알고 있는 이들의 찬란함과 담담함의 무게란. 

아니, 그들은 덤덤하기보다, 덤덤해져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그들은 쏟아지는 외로움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이를 테면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외로움을 말이다. 길을 걷다 문득 주저 앉아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리기도 할 것이고, 비릿한 생선 냄새에 서로의 식습관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휠체어를 탄 누군가를 봤을 때라던가, 어항 속의 물고기를 마주쳤을 때라던가, 익숙한 이름을 듣고, 익숙한 단어를 발견하고, 익숙한 소설을 읽고, 익숙한 향기를 맡고, 익숙한 노래가 들려올 때마다, 그들은 서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색이 바래가는 여느 사진처럼, 처음 뜨겁고 짙었던 감정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렇게 바래져갈 뿐이다. 그 바래진 사진을 보며 헛헛한 기억을 떠올릴 뿐, 조금씩 천천히 단단해질 뿐. 그래, 사랑이란 어쩌면 그런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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