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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Dec 18. 2017

잊으면 내가 지는 거니께

:: 아이 캔 스피크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반인류적인 대학살을 범했던 홀로코스트. 유럽에는 그토록 잔인했던 대학살의 슬픔을 그대로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끔찍하고 참혹했던 그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과거의 실수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 폴란드 여행 중 그런 곳 중 하나를 찾았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는 기만적인 문구가 쓰인 독일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가 바로 그곳이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털을 보고, 그들이 남기고 간 옷가지를 보고, 그들이 채 신지 못한 신발을 보았다. 벽면을 가득 메운 아득한 그들의 얼굴에 두 눈을 마주치고, 좁디좁은 침실과 방 안에서 잠시 숨이 막혀왔다. 벅차오르는 그때의 감정이 어떤 형태의 것인지 나는 감히 형용할 수 없었다. 
다만 멈추지 않는 불안함이 내 두 눈을, 두 발을, 두 가슴을 흔들었다. 끝없는 공포와 불안의 끝에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렸을까.

아우슈비츠를 나오기 직전, 우습게도 내가 마주친 것은 일본 초등학생들의 편지 더미였다. 이제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곳에, 작은 색종이 편지 더미가 도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그들에게 그들의 선생님은 무어라고 가르쳤을까. 지난 독일의 만행에 대해, 지난 독일의 만행으로 인해 아파했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 만행으로부터 이어진 지금의 오늘에 대해. 과연 그들은 어떤 말을 주고받았을까, 나는 분노와 무력이 뒤섞인 석연찮은 마음으로 두둑하게 쌓인 색종이 편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이캔스피크 스틸컷



한 시도 쉬지 않고 바삐 민원을 넣느라 바쁜 나옥분 할머니. 옥분은 명진 구청의 '전설의 블랙리스트'라고 불릴 만큼 골치 아픈 구민이다. 물론 그녀의 민원이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기는 하나, 민원을 처리하는 쪽에서도, 민원의 원인을 제공하는 쪽에서도 시답잖은 일까지 참견하고 나서는 오지랖 넓은 옥분은 영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블랙리스트를 상대하는 인물이 하나 있으니, 바로 명진 구청의 뉴페이스 민재였다. 날 세워 자신의 처지를 내세우기 바쁘던 옥분과 민재는 분명한 경계에 놓인 두 인물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점점 그 경계의 틈을 좁혀간다. 공무원과 민원인에서 영어 선생님과 제자로, 생판 모르던 남에서 밥을 함께 나누는 식구로, 그렇게 점점 친구로, 할머니와 손자로, 가족으로 점점 둘은 서로의 부재를 위로하며 
우리가 된다. 

민원 [명사]
1) (民願) 주민이 행정 기관에 대하여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일. 
2) (民怨) 백성의 원망.


시장에서 시작한 그녀의 작은 민원 세계는, 그녀의 삶 전반으로 나아간다. 아이들이 다칠까 봐, 누군가 불편함을 살까 봐, 어렵게 살아가는 동네 주민이 삶의 터를 빼앗길까 봐 따뜻한 마음으로 오지랖을 부리던 그녀의 민원은, 온 삶을 꼭꼭 숨겨두려 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민원으로 이어진다. 일본군이 남기고 떠난 갖은 상처에 대해, 감춰두고 싶었던 작은 사진 한 장에 대해, 바득바득 일을 갈아댈지언정 가까운 이에게도 감히 입을 뗄 수 없었던 조심스러운 기억에 대해, 그녀는 씩씩하고 담담하게 운을 뗀다. 그 누구라도 원망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던 끔찍한 소녀의 기억을, 소녀들의 마음을 담아. "아이 캔 스피크." 

ⓒ아이캔스피크 스틸컷



옥분의 목소리에 담긴 이야기는 옥분의  삶에 대한 회고이기도 했고동시에 옥분을 둘러싼 우리 모두의 역사이기도 했다단단하게 엉켜 절대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수많은 경계에 대해 영화는 말한다. 우리가 '우리'이기 위해서는   줌의 진심만이 선행되어  이라고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되레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게아릿하게 새겨지는 것들이 있다수많은 진심이 모여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 아픔이 있다.  많은 아릿함을 치유할   줌의 진심은 과연 어디서 찾을  있을까. 나는 어떻게 그들을그리고 이들을 마주해야만 하는 걸까아우슈비츠 수용소 한쪽에 놓여 있던 조그만 필체를 떠올리며춥고 외로운 옥분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그려본다진심으로 살아가는 그리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든 일을 잊지 않는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간 그들에게 위안부의 운명이 선택이 아니었듯이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비극의 기억이란 선택의 몫이 아닐 거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Of course, of 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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