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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n 18. 2018

그녀들의 기록

:: 영화 허스토리





이 글은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위키피디아, 드레퓌스

익명의 편지 속 프랑스 육군의 기밀문서가 담겨 있다. 프랑스 정보국은 해당 편지가 독일의 육군 대령에게 가는 편지임을 알게 된다. 조사 결과 정보국은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모든 언론은 드레퓌스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비난하고 탄압하기 시작한다. 드레퓌스가 유배를 당한 이후, 프랑스 정보국의 피카르는 기밀문서의 필체가 에스테르하지 소령과 매우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이미 드레퓌스 사건을 굴욕적으로, 공공연하게 처리한 상부와 언론이 앞선 판결을 철회할 리는 없었다.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는 그들의 무책임한 대응. 이에 문학가와 운동가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여 진실에 대한 항의를 시작했고, 결국 재심이 열린다. 재심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의 저울은 공평할 줄을 몰랐다. 불편한 진실 공방이 한참 반복된 이후에야 프랑스 대통령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1894년부터 1995년, 꼭 100년이 걸린 진실 게임이었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

일곱 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 한 가정에 수녀 마리아가 가정 교사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늘 그랬듯 낯선 가정교사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 넘치고 솔직한 마리아와 점점 가까워진다.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은 마리아와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아이들의 아버지인 대령에게 저 자신도 모르는 새 일렁이는 감정을 갖는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급작스럽게 집을 떠나 수녀원으로 돌아가지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온 아이들이 맘에 걸려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다시 돌아간다.


대령은 재회한 마리아에게 청혼하고, 함께 달콤한 신혼여행을 떠난다. 행복한 시간도 잠시, 대령은 전쟁 소집 명령을 받는다. 전쟁이 가정에 미칠 영향을 걱정한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기 위해 피난을 떠난다. 그 길에 가족 합창단이 되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수녀원에 몰래 숨어 있기도 하고, 긴긴밤을 지새는 험난한 여정 끝에 그들은 평화의 땅, 스위스에 도달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거리다.




ⓒ영화 허스토리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어?


영화 <허스토리>는 수년간 진행된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한 재판을 다루고 있다.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정숙은 직원의 기생 관광 문제로 인해 당한 영업 정지 기간 동안 여행사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일본군 강제위안부 피해자 신고센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별 긴장감 없이 시작한 일에 정숙은 제대로 몸과 마음이 동하기 시작한다. 그냥 던진 자신의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절대 다시는 새살이 돋을 수 없는 잔인한 상처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그녀의 참회 방식은 또 다른 참회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정숙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다니고 설득하고, 그렇게 모인 할머니들은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 곪을 대로 곪아버린 가슴 아픈 상처를 꺼내기 시작한다. 기립이라는 말에 일어서고, 착석이라는 말에 앉는다. 일어서고 앉는 것조차, 발언의 순간조차 수동적으로 이뤄지는 차가운 재판장. 그녀들은 과거와 다를 것 없이 잔인한 오늘을 재회하고, 또 다른 모멸의 순간을 재연한다. 그토록 잔인한 싸움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영화 허스토리



다 증언하고 있는데,
증거가 없다니요?


돌려줘, 17살 때로.

100여 년이 넘게 진행된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 공방처럼,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 역시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영화 속 관부 재판에서는 일본이 자신의 죄를 일부 인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피해 할머니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최초의 승소 판결.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해당 항소는 기각당했다. 최초의 일부 승소 판결마저 잔인하게 찢기고 또 밟힌 사례.


언제까지 이럴 거냐는 안타까운 울부짖음이 깊고 슬픈 메아리를 만들고, 일본의 차가운 재판장의 모습은 잔인한 국가주의와 비인권이 여전히 만연한 오늘의 역사를 또렷하게 연상시킨다. 드레퓌스 사건은 당시 사건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다 죽고 나서야 마침내 드레퓌스를 무죄라고 인정했다. 작년, 관부재판의 마지막 원고 할머니가 소천했다. 용서와 사과만큼은 분명 주인이 있고, 때를 놓쳐버린 사과는 결코 진정한 사과가 될 수 없다.




ⓒ영화 허스토리

전쟁이 싫어 피난을 가는 마리아와 가족들의 밤은 길고 길다. 그토록 잔인한 전쟁, 그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시공간 속에서, 전쟁은 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왔다. 그 어떤 사과도, 그 어떤 망각도 비극의 아픔을 막아내지는 못하는 것. 이를 치유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은 결코 돌아갈 수가 없어서 이들의 눈물은 채 마를 길이 없다. 전쟁 이전의 평안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가 없다면, 평안했던 시절의 하늘을 닮은 땅으로나마 향하는 수밖에. 피난길보다 더 고되고 험난한 걸음으로, 할머니들과 정숙은 걸음걸음을 이어간다.



ⓒ영화 허스토리


정숙의 딸 혜수의 손에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 책이, 그녀의 방 한쪽 벽면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한때 학교를 그만둔다는 으름장으로 엄마 말을 통 듣지 않던 혜수지만, 그녀는 충분히 똑똑하고 다부진 모습을 줄곧 보여준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기만 한 엄마의 서투른 몫을 대신하기도 하고, 할머니에게 언제나 늘 든든하고 따뜻한 미소로 함께하기도 하고, 집회에서 마이크를 들고 또렷하고 단단한 제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다.


할머니와 엄마의 걸음걸음을 이어받은 딸의 모습. 그녀와 그녀와 그녀에게서 끈끈한 연대감과 확고한 내일의 걸음을 읽는다. 그녀에게서, 그녀에게로, 다시 그녀에게로, 지금 여기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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