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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Oct 02. 2018

:: 영화 보리 vs 매켄로

나의 플레이를 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영화 <보리 vs 매켄로>는 윔블던의 4연패 이후 세계 최초의 5연패를 꿈꾸는 보리와 그에 도전하는 테니스 코트의 새로운 악동 매켄로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윔블던 테니스 대회 우승을 앞두고 결승에서 만난 보리와 매켄로. 영화는 우승을 위해 달려온 두 사람의 긴장감을 비춘다. 카메라는 이리저리 반동하는 테니스공처럼 영화의 시점을 자유자재로 교차한다. 테니스 코트 위의 순간과 회상의 순간과 숙소나 락커의 순간들이 빠르게 오고간다. 보는 이들에게 손에 온 땀을 쥐게 했던 1980년 윔블던의 명경기가 영화 <보리vs매켄로>를 통해 부활한다. 보리와 매켄로의 그날, 매켄로와 보리의 그날.



테니스는
인생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드벤티지, 서비스,
폴트, 브레이크, 러브 …
그래서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안드레 애거시

영화는 전반적으로 좋았다. 하면서도 '웰메이드 영화'라는 의견에 공감했다. 수미쌍관을 이루는 장면이 아름다웠고, 장면과 연출마다 각기 다른 감상이 풍성하게 나왔다는 데서 흥미로웠다. 탄탄한 플롯과 신기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맘에 들었다. 오이디푸스니, 방어기제니, 플래쉬백이니, 화면 구성이니, 헨드 헬 기법이니 이것저것 얘기할 것도 풍성했다. 그런데도 나는 한참동안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왜였을까. 무엇 때문이었을까.




누군가는 무너지고, 누군가는 올라선다. 답은 생각보다 쉬웠다. 정점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보리와 올라서기 위해 부단히 성장하는 매켄로 사이에는 내가 낄 자리가 없었다. 쉽게 말해 '내 코가 석 자'기 때문이라거나, '고래 싸움에 새우가 터진 꼴'이라거나. 영화는 연약해져 있던 내 안의 무언가를 세게 건드렸다. 형용할 수 없는 갑갑함이 영화 읽기를 가로막았다. 영화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나는 나에게 재차 물었다. 나는 과연 그들처럼 온전히 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던 적이 있는지. 최고가 되기 위해 정녕 끊임없이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는지. 이게 무슨 지나친 감정이입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나는 부끄러웠다.

언제부턴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두려웠다. 최선을 다 해봤자 나오는 결과가 그저 그래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꽤 괜찮아 보이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최선의 무게 자체를 견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용기가 없어 적당히 하는 시늉을 하다가, 그 시늉조차 힘이 들면 그냥 정처 없이 도망을 다니다가, 결국엔 폭발한 화산재처럼 힘없이 조용하게 흩날리는 먼지가 되기를 자처했다. 덕분에 나의 무기력함은 어느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았고, 그런 나를 보는 나의 마음 자체도 가벼웠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유명한 경기 시즌 때마다 함께 TV를 보던 엄마는 국가 대표 선수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불쌍하다고 했다.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놀고 싶은 것 못 놀고 내내 운동만 하다가, 겨우 4년에 한 번 몇 분도 채 되지 않는 경기로 판단되는 삶이 불쌍하다고 했다. 그에 반해 나는 정반대였다. 나는 늘 운동선수들을 부러웠다. "그래도 쟤네는 목표라는 게 있잖아. 계속 달려갈 수 있는 목표가 있고, 이겨야 할 대상이 있고. 그걸 위해 준비할 수 있는 시간도 공평하게 주어지잖아. 적어도 '자기 기록'에 도전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으니까."


나는 그들이 느끼는 부담감과 압박감이, 선택받은 자들만 느낄 수 있는 우월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그들처럼 '숙제'가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들에 비해 내 삶은 온통 목적 없는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내가 사는 세계는 나 하나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치열하고 혹독한 곳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ㅡ 서로의 라이벌이었던 보리와 매켄로는, 결국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가장 큰 승리의 맹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두 선수의 후련한 얼굴을 마주하며, 그리 만족스러운 현답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만의 목표를 세우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먼저라는 결론을 내린다. 나에게 최선이란 무엇일까,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 내가 달려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하는 막연하고 추상적이지만 힘이 되는 질문들. 덧붙여 누구보다 내가 먼저 나를 인정하고 격려하자는 자기애적인 다짐도 함께. 보다 후련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의 플레이를 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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