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연구에 의하면 아기는 엄마의 감정에 대한 공감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난다. 엄마의 표정이나 여러 가지 감정 신호를 통해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엄마가 느끼는 것을 같이 느끼고 반응한다. 그래서 아기는 엄마의 행복도 고스란히 흡수하지만, 엄마가 무의식에 묻어 둔 상처와 결핍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엄마의 불행을 온몸으로 느낀 아이는 자신이 엄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망상을 가지고 엄마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본능적으로 떠안는다. 불행한 엄마의 정서적 배우자가 되고, 자신의 불행에 몰두해 있는 엄마를 대신해 작은 엄마가 되고, 가족의 수치를 덮는 모범생이 되고, 엄마를 웃게 하는 재롱둥이가 되고, 엄마의 짐을 덜어 줄 해결사가 되고, 사이 나쁜 부모를 묶어두기 위해 문제아가 된다.
아이는 엄마의 필요를 감당해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신의 욕구 충족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엄마와의 경계는 무너지고, 감정과 욕구의 피아 구분이 사라진다. 결국에는 엄마의 필요인지 나의 필요인지 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결핍과 상처를 품고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엄마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의 인생을 침범하고 빼앗고 황폐화시킨다.
한 아이가 타고난 잠재력을 맘껏 발휘하며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생 초기의 필수적인 욕구들이 양육자에 의해 충분히 충족되어야만 한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채워지지 않은 유아기적 갈망을 지닌 엄마는 자신의 결핍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의 욕구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조언을 듣고 책을 읽고 의식적인 노력을 할지라도 무의식의 지배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충분히 충족되지 못한 아이의 욕구는 시간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결핍의 상처는 고스란히 아이의 무의식에 저장되고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린 시절의 욕구에 압도되어 살아가게 된다. 해소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결핍에 매달려 외부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을 갈망하느라 배우자와 자녀를 속박하거나 의존하거나 이용하여 관계를 망치고 만다. 엄마의 삶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딸은 엄마의 팔자를 닮는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무의식의 수준에서 일어나므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내가 나의 결핍과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의 정체를 의식적으로 마주할 때까지.
chapter 2.
희진은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한 아이였다.
“너를 안 낳았어야 했는데... 독한 년, 얼마나 질기던지 별 짓을 다해도 징글징글하게 안 떨어지더라. 너 때문에 도망도 못 가고 내 팔자가 이 모양이 됐어. 넌 나한테 잘해야 돼”
엄마는 걸핏하면 자신의 불행이 희진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불행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한 아이의 엄마이고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희진은 여태 한 번도 엄마를 이겨본 적이 없다. 언제나 엄마는 크고 희진은 작다. 엄마는 숭고한 희생자이며 희진은 빚진 자였다.
“엄마는 저하고는 달라요. 멋쟁이이고 인기도 많고 엄청 똑똑한 사람이에요... 저는 엄마를 하나도 안 닮았어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그랬어요... 너는 잘하는 것도 없고 예쁘지도 않고 머리도 나빠... 지금도 저 혼자 뭔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게 불안해요. 제가 잘못할 것 같아서요. 엄마가 결정해줘야 안심이 돼요.”
희진의 엄마는 희진과 같은 상처를 가졌다. 딸이어서 차별받았고, 차갑고 상처 많은 엄마의 필요를 채우느라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했다. 어린 희진은 본능적으로 엄마의 묵은 상처와 결핍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를 잃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는 인정과 애정을 갈망하는 엄마의 상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날개를 꺾고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억압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희진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억압한 대가로 고유하고 빛나는 본래의 나를 잃어버렸다. 희진은 엄마가 골라주는 옷을 입고, 엄마가 원하는 분야를 전공하고, 엄마가 고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 희진이 평생 돌본 것은 결국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엄마의 상처였고, 채우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것은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엄마의 욕구였다. 희진은 도대체 누구의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희진에게 엄마는 평생 절대적인 존재였다. 자신을 죽이지 않은 엄마에게 은혜를 갚아야 했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쓸모 있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희진의 부모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었고, 엄마는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희진에게 쏟아냈다. 엄마를 비난할 수 없는 희진은 자신의 불행이 전적으로 아버지 때문이라고 믿었다. 희진의 아버지 또한 해결되지 않은 상처를 술로 달래는 사람이었다. 희진에게 엄마는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은 고맙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희진은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엄마의 입장에서 세상을 느끼고 생각하고 대응하며 살아왔다. 부엌데기가 필요하면 부엌데기가 되고, 광대가 필요하면 광대가 되고, 욕받이가 필요하면 욕받이가 되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벌어 엄마의 손에 쥐어 주었다. 배고픈 아기가 엄마의 빈 젖에 매달려 갈구하듯 희진은 엄마의 인정과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왔다. 희진은 여전히 엄마에게 버려질까 봐 두렵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집을 나가 며칠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희진이 그녀의 내면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
chapter 3.
“모르겠어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매일매일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답답해요. 그냥 사는 게 불안하고 두려운데 뭐가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당신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을 느끼고 그 고통을 밖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당신 자신에게 좀 더 가까워진 것이다. 당신의 용기와 자기 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인생 초기에 나를 안전하게 품어주는 엄마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세상은 믿을 수 없고 위험한 곳이다.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믿음이 내면에 자리 잡았을 것이고, 엄마로부터도 받지 못한 도움을 사람들에게 받는 것도 힘들 것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섬처럼 단절된 존재라는 신념에 고통받고, 감정과 욕구를 느끼게 하는 내 몸의 감각과도 단절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 불안과 두려움, 혼란이라는 내면의 감정을 느끼고 밖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당신은 분명 수많은 고통의 날들을 홀로 견뎌왔을 것이다.
생애 초기 우리 모두에게는 엄마가 반드시 필요했던 시간이 있었다. 엄마에게 버려지는 것이 죽음과 같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고, 나는 내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나의 행복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다. 물려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해지기로 결단했다면 용기를 내어 과거를 탐구해야만 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연속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기꺼이 책임지는 어른의 눈으로 엄마와의 관계를 정면으로 바라보자.
엄마는 숭고한 희생자가 아니며 나는 엄마에게 빚진 자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각자의 인생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엄마의 선택은 그녀가 처했던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엄마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다. '너 때문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아이 같은 책임회피일 뿐이다.
딸이 엄마에게 갚아야 하는 은혜나 빚 같은 건 원래 없다. 내 아이가 나에게 갚아야 할 어떠한 빚도 없는 것처럼 내가 나의 엄마에게 갚아야 할 빚이라는 것도 없다. 진정한 어른은 내 선택의 결과로 일어난 감정과 처해진 상황을 스스로 책임진다.
엄마의 인생을 책임지려는 딸의 무모한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로 귀결된다. 타인의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다. 나는 그 누구의 인생도 아닌 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순리이고 진리이다.
부디 행복해지시길 바란다.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엄마를 가졌지만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대물림을 끊는 것이다.
chapter 4.
“나는 엄마가 없었어요. 나는 엄마 없는 애였어요.”
마침내 희진의 몸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통곡한다.
오랜 세월 엄마의 필요에만 반응하던 그녀의 몸이 마침내 자신의 고통에 “예”라고 대답한다.
“몰랐는데... 제 안에 엄마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 있었어요. 그게 막 올라와요."
오랫동안 내면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희진의 감정과 욕구들이 희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제 우리를 돌아봐줘.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줘. 우리가 너야. 더 이상 우리를 버리지 마.
"근데 죄책감이 들어요... 엄마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괜찮다. 어떤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
느끼지 마라. 말하지 마라. 표현하지 마라.
생애 초기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원 가정에서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받는 메시지들이다.
나의 감정을 억압해온 모든 메시지를 깨부수라.
누가 나에게 분노를 금지했는가. 나의 분노 속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느끼고 말하고 온 몸으로 표현하는 나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나의 인생을 살 수 있다.
모든 감정은 옳다. 더 좋은 감정도 없고 더 나쁜 감정도 없다.
감정은 나의 과거가 담긴 나만의 고유한 기록이다.
감정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말해주는 나만의 나침반이다.
감정을 잃으면 자신을 잃고 길을 잃는다.
고통은 감춰진 진실을 알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온다. 밖으로만 향해있던 나의 의식을 내 안으로 돌리라는 삶으로부터의 초대이다. 어느 날 당신에게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어딘가에 갇혀 있거나 묶여 있는, 내 안에 내가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일이다. 나는 지금껏 누구의 인생을 살아왔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살아주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위해 살 수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나도 타인을 구원할 수 없다. 엄마는 엄연한 타인이다. 엄마의 감정과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당신의 관심과 에너지를 지나치게 쓰고 있다면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엄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존재는 엄마 자신뿐이다. 엄마와의 질긴 탯줄을 과감히 끊어야만 한다. 엄마와의 탯줄을 끊어야 자기 자신과의 연결을 회복할 수 있다. 엄마에게 헌신하는 충성을 스스로 끝내야만 나의 관심과 에너지를 나의 행복을 위해 온전히 쓸 수 있다. 그래야 나의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