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큰 소리로 다투고 있는 엄마와 아버지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지 않는 서로를 향해 어린아이처럼 악다구니를 치고 있었다. 나는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 같은 그 자리에서 당장 사라지고 싶었지만, 몸이 얼어붙어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의 싸움을 말릴 수도 없었고 그곳을 떠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들이 싸우는 소리를 자궁 속에서부터 줄곧 들어왔다. 소리 높여 싸우거나 혹은 말없는 냉전을 벌이거나, 그들의 싸움은 어린 나를 몹시 아프고 두렵고 불안하게 했다. 함께 사는 것이 불행한 그들이 언제 나를 버리고 떠날지 모를 일이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는 갈 곳이 없다.
괴로움과 원망을 토해내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뒤엉켜 마치 고통에 못 이겨 함께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그들의 두려움과 분노와 슬픔이 커다란 파도처럼 나의 작은 몸을 덮쳤다. 내 조그만 어깨는 두려움 때문에 뻣뻣하게 오그라들고, 여린 두 다리는 녹아내려 바닥에 엉겨 붙었으며, 작은 심장은 곧 터질 것처럼 죄어들어 숨 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어린 나의 몸과 마음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서너 살 무렵의 나의 첫 기억이다.
7세 이전의 경험은 아이의 잠재의식에 입력되어 전 생애에 걸쳐 반복 재생된다. 아이에게 엄마는 첫 세상이며 부모는 세상의 전부이다. 인생 초기에 부모의 따뜻한 손길과 눈길을 받지 못한 아이에게 세상은 믿을 수 없는 곳이 된다.
나는 자궁 속에서 엄마의 두려움과 불안을 나눠 받았고, 태어난 이후로는 불행한 부모의 불화와 그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자궁속에서부터 엄마가 어린 나를 두고 집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던 부모의 불화는 나의 생존과 안전을 평생 위협했다.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고,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며, 세상은 안전한 곳임을 알려주는 존재인 부모로부터 버려졌던 나의 첫 기억은 어린 나의 몸과 무의식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믿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받아주는 이 없는 내 존재에 대한 수치심, 사라지고 싶은 욕망과 떠날 수 없는 무력감은 내 자아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나의 부모는 그들 내면의 어린 시절의 상처와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의식에 저장된 자신들의 상처에 압도되어 나를 돌볼 수 없었다. 모든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나도 부모의 숨겨진 고통을 온몸으로 느꼈고, 불행한 그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가 떠난 뒤 나는 아버지에게 생존을 의지하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분노 외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를 위해 옆에 있어주거나 나의 필요에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엄마에 대해 끝까지 침묵했고, 그것은 나에게 엄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때로 침묵은 비난보다 더 강렬한 비난이 된다. 아버지의 비밀이었던 엄마는 고스란히 나의 비밀이 되었고, 이로 인해 나는 엄마와 단절되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엄마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고,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은 공포가 되었다.
아버지는 평생 오래된 상처에 갇혀 살았고, 우리 부녀는 다정하게 지냈던 한 조각의 기억조차 없었지만,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이해하는 딸로 자랐다. 나는 아버지가 필요했다. 이미 엄마를 잃었는데 아버지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움에 떠는 엄마 잃은 어린아이가 오랫동안 내 안에 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문젯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그의 뜻에 순종했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의 감정을 돌보는 역할을 떠맡았다. 착한 딸로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사는 동안 나는 스스로의 감정과 욕구에는 더 소홀하고 무감각해졌다. 심지어 나의 욕구에 집중하고 충족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만큼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졌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나를 덮쳐온 미치거나 죽을 것 같았던 고통과 혼란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버려짐에 대한 공포와 나쁜 딸이 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 때문에 나는 수십 년 동안 나 자신의 욕구와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며 살았다. “저만 아는 이기적이고 독한 년”이 아니라 “입 댈 것이 없는 착한 딸”, “너 없으면 안 되는 딸”이 되고 싶었다.
성연(50)은 1남 5녀의 막내딸로 자랐다. 어릴 때 죽은 1남 1녀를 포함한다면 그녀는 2남 6녀의 막내딸이다. 성연의 아버지는 술과 여자 문제로 평생 엄마의 속을 끓였다. 성연의 엄마는 대를 끊는 죄책감과 아들을 낳지 못하는 수치심이 두려워 1년에서 3년 터울로 연이어 출산을 했다. 성연에게 엄마는 “평생 애만 낳고 아버지 때문에 고생만 한 사람”이었다. 어린 성연은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집을 나갈 버릴까 봐” 두려웠다. 엄마가 저녁 늦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면 어린 성연은 온몸이 긴장되곤 했었다.
성연은 아들이면 더 좋았을 “엄마의 몸조리를 위해 낳은 아이”였다. 엄마의 필요에 의해 잉태된 아이였던 성연은 엄마를 행복하게 만드는 딸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와 맞서 싸우면서 엄마를 지켰고, 명문대에 입학해서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었으며, 졸업 후에는 고액 연봉의 전문직 종사자가 되어 엄마의 생활비를 책임졌다. 그녀의 한결같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관심과 애정은 언제나 오빠의 몫이었다. 그녀의 오빠는 끊임없이 일을 저질렀고 그 뒷감당은 엄마와 성연의 몫이었다.
몇 년 전 엄마는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아들에게 증여하고 병든 아버지와 함께 성연의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오빠의 무관심으로 부모가 살 집의 전세금까지 성연이 감당해야 했다.
행복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어린 성연의 수 십 년간의 노력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엄마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고, 엄마의 관심과 애정은 여전히 아들만을 향해 있었다.
성연은 오랫동안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려 왔다. 지금도 약 없이는 잠들기가 어렵고 약을 먹어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몇 년 전부터는 여러 가지 갱년기 증상까지 겪고 있어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녀는 이제 해방되고 싶다.
“행복해지는 것 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평생 어딘가에 묶여 산 것 같아요... 이젠 정말 지쳤어요”
나와 성연이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소홀하게 여기고, 타인의 욕구와 감정을 채우는 것을 행복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대가는 피폐해진 몸과 마음이었다. 누구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행복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의 욕구와 감정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삶은 기어코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만약 엄마의 둘도 없는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면 당신의 몸과 마음은 분명 깊이 병들어 있을 것이다. 엄마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딸로 살기 위해서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들-나의 감정과 욕구, 그리고 그것들을 온전히 느끼고 표현하고 충족하면서 형성되는 진정한 자아-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엄마를떠나 나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나의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환대하고, 귀하게 여겨 나의 내면이 넘치게 채워질 때 비로소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내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차서 밖으로부터의 사랑과 인정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질 때, 우리는 버려짐의 두려움에서 마침내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