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해서 쓸모는 없지만 눈요기를 위해 물건을 사모으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귀여운 것들에 둘러 싸이는 게 행복이라 말했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물건을 사는 게 어려워졌다.
어느 일요일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본 환경스페셜 다큐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를 보고 나서부터다.
과잉생산, 과잉소비 된 옷들은 결국 버려지고, 우리나라에 헌 옷을 처리하는 경로는 없어 방글라데시나 케냐 등 다른 나라로 버려진다. 의류 폐기물들은 그 나라의 강을 막고 대지를 덮어 죽어가고, 사람들도 고통받고 있었다.
짐작하지도 못했는데 양은 어마어마했고, 화면 가득 채운 폐기물 산은 공포스러웠다.
언제부터 옷이 저렇게 많이 버려졌지?
나 어릴 적에는 옷뿐만 아니라 물건이 귀했다.
옷을 물려 입고, 해진 옷은 기워입었다. 짧아진 바지는 단을 내려 수선하고, 질린 옷은 리폼해 입었다.
옷을 사는 날은 생일이나 명절, 특별한 날이었다.
언제부턴가 쉽게 사고, 쉽게 버렸다.
옷을 사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됐다.
구멍이 나거나 얼룩이 지면 버렸다. 거슬리는 부분에 덧대는 것은 멋지지 않아 보였다. 아깝다는 생각은 했지만 다시 사면 그만이었다. 버려진 옷은 다른 누군가가 입겠지 추측하고 깊게 생각한 적이 없다.
다큐를 보고 나서 옷뿐만 아니라 다른 생산품도 쉽게 사기가 어려워졌다.
물건을 감싸고 있는 포장용지들.
더 사라고 부추기는 광고들.
그것들이 덕지덕지 붙은 욕심처럼 느껴진다.
비닐을 보면 석유정제공장을 지날 때 자욱이 하늘을 덮은 연기가 생각나고, 옷들을 보면 자연을 뒤덮은 옷 쓰레기산이 떠오른다.
왜 그렇게 많이 만들어야 하나?
유행은 왜 빠르게 돌아갈까? 왜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할까?
대량생산하고 수익을 벌어들인 기업들은 뒤처리는 하고 있지 않다.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나는 알면서도 의미 있는 행동은 하고 있지 않다.
환경다큐를 보고 난 후, 소비하기 어려워졌다는 소감 몇 글자정도나 어설프게 끄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