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16일째. 연락하고 싶을 때 자문해야 할 것

죽었다고 생각하면 맘이 편할까?

by 하마

헤어진 그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드릉드릉하다. 내심 그에게 연락할 날을 정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별 한 달 뒤, 또는 딱 반년이 지난날. 오늘만 아니라면 어느 때든 상관없다. 이때쯤은 연락해도 되지 않을까 위안하며 당장 연락하고 싶은 맘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연락하고 싶은 이유는 간단하다. 보고 싶어서, 궁금해서, 외로워서. 나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고 싶고, 나는 이렇게 아픈데 그는 어떤지 궁금하고, 혼자가 되어서 외롭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에 분노가 더해지면 기다릴 것도 없이 당장 카톡 폭탄을 날리고 싶어 진다. 카톡 문구도 오랜 고민 끝에 '바람이나 피우는 나쁜 새끼야'를 가장 상스러운 장문의 글로 써두었다.


내가 그에게 듣고 싶은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오직 그뿐이었다. 상처를 주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그가 해준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빨리 괜찮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외도가 들킨 뒤 헤어지는 과정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다'는 변명과 회피로 일관했다. 마치 그의 사죄를 듣지 못해서 내가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직 너만 아는 대답

가장 큰 고비는 창문에 손을 찧었을 때와 회사에 재밌는 일이 생겼을 때였다. 창문을 닫다가 손을 아주 세게 찧었는데 병원 갈 정도는 아니고 아프긴 엄청 아팠다. 딱 애인에게 징징거릴 정도로. 회사에서 비호감이던 상사가 잘렸을 때도 이 재미난 사건을 털어놓을 사람은 전 애인 뿐이었다. 회사의 모든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있을 정도로 매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라면 '에구 손은 많이 아프니', '그 상사 결국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해주었을 것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그와 나눌 수 없어서, 익숙한 대답을 들을 수 없어서 서글펐다.


상처에 정당한 이유란 없고

헤어진 상대방에게 전화하고 싶고 욕을 퍼붓고 싶고 사과를 듣고 싶은 이 모든 마음의 이유는, 상처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정당한 이유라도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의 이별에 당위성이 생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웠어도 몇 년을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상대를 이해하고 싶고 더 나아가 그를 사랑했던 나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속이라도 시원하도록 욕을 퍼부어볼까 싶었지만 아직까지 참고 있는 것은 아래의 질문 중 어느 하나에도 YES가 없어서다.


-내가 묻는다고 해서 그가 속 시원하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진심 어린 사죄를 할 인간인가?

(만약 YES라고 생각이 든다면 사귈 때의 그가 아닌 헤어질 때의 그를 떠올린 뒤 다시 물어볼 것) NO and NO

-만약 그가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빈다고 해도, 이 분노와 배신감이 사라질 것인가? NO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다 해도 바람피운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NO

-결국 그를 용서하게 된다 해도 다시 만날 것인가? NO

-다시 그를 만나고 싶은가? NO


이별을 되돌릴 수 있는 숨겨진 진실 같은 건 없다

내 질문에 그가 진심으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면 연락을 해서 나아질 것은 없다. '결국 연락을 하고 말았어'라는 자괴감만 생길 터였다. 게다가 내가 묻고 싶은 것들은 하나같이 답이 없는 것들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허튼짓을 해왔니. 그 여자랑은 그래서 지금 사귀고 있니.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긴 하는 거니. 그에게 아무리 캐물어봤자 이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외도의 진실을 사사건건 알게 된다고 해서 용서와 위안이 찾아오지는 않을 테니. 오히려 새로운 지옥이 열릴지도 모른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그의 외도가 없던 일이 되는 것. 그건 타임머신이 있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그가 바람피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난 최선을 다한 쪽이니까. 그가 자신의 시간을 되돌려서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는 이상, 내가 이 관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늘이 두쪽 나도 없다.


타임머신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데 연락은 해서 무엇하리- 하는 너덜너덜한 기분이 되었다. 덕분에 그에게 연락하고 싶다는 생각은 파스스 부서졌지만 대신 패배감이 몰려왔다. 전 애인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져서 만사가 불만스럽고 모든 이에게 화가 난다. '왜 인간들은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는 걸까?' 하고 화를 내며 바보같이 술을 잔뜩 마시고 나면 바보처럼 카톡을 보내고 싶어 지고 그러다가 숙취로 고생한 뒤 다음날 다시 술을 퍼마신다.


나는 이렇게나 오래 버텼는데, 시간은 아직도 16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표지 이미지 : <어린 왕자>_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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