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앨범을 열지 마오
결국은 봐버렸다. 헤어지기 전에 나눈 달콤 달달한 카톡들. 5년 동안 같이 찍은 수많은 사진들. 괜찮아질 때까지 절대 안 보려고 했는데 다른 옛날 사진을 찾으러 사진앨범을 뒤적거리다가 그만.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도 일부러 참았는데.
한번 사진을 보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어서 돌이킬 수 없는 역주행을 시작했다. 귀여워서 일부러 캡처해둔 카톡 대화창들이 하나하나 나를 후벼 파고, 사진 많이 안 찍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끝없이 펼쳐지는 데이트 사진이 나를 후려친다. 핸드폰 카메라 너머에 있는 서로를 우리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봤구나. 이렇게 많은 곳을 가고 먹고 마셨구나.
헤어진 첫날만큼 눈물이 났다. 사진을 본 내가 죄인이지. 어쩌자고 앨범을 열었을까. 그를 생각하면 마지막 날의 나쁜 새끼로 기억했는데 이젠 다시 사귈 때의 내 귀여운 남자친구, 사랑스러웠던 내 남자로 머릿속에 다시 콕 박혔다. 이건 사진처럼 지울 수도 없었다.
'우린 헤어질 수 없어. 이렇게나 달콤했는데 절대 헤어질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런데 헤어졌어, 이미.'
이 두 가지의 마음이 부딪히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그를 이렇게나 사랑했고 그도 나를 사랑했는데, 우리가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헤어진 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의 외도를 용서해줬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를 잡았어야 하는 건 아닐까? 나중에 돌이켜보며 그를 내 인생 최고의 사랑으로 기억하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는 걸 알기에
초인적인 힘을 내어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평생 그를 최고의 사랑으로 기억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내가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평생 잘했다고 여길 일이라는 건 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그에게 욕을 한 바가지 하고 싶은 욕구를, 그렇게 하면 아마 내일부터 나는 슬픔에 자괴감까지 느껴야 할 거라는 생각으로 눌러 내렸다. 다행히 아직 많이 취한 상태는 아니어서 핸드폰을 침대 밑에 쑤셔 박아놓고 맥주 한 캔 더 마시고 잠을 잤다.
다음날 출근 때문에 더 울 수 없다는 게 속상했다. 출근이고 뭐고 그냥 펑펑 더 울고만 싶은데, 헤어진 3일째 쯤 이미 예고 없는 연차를 써버려서. 한 달에 후처리 연차 두 번은 좀 위험하다. 회사에도 헤어졌다고 고백한 상태라 솔직히 오늘 너무 슬프다고 하면 상사는 이해해주긴 하겠지만, 그러고 다음날 출근할 용기가 안 날 것 같았다. 이별 때문에 슬퍼서 연차를 쓴 직원을 동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거기 있는 걸 알지만 없다고 생각하기
그가 나에게 한 짓은 단순히 이 연애를 망가뜨린 것에 그치지 않았다. 외도는, 지금까지 그를 사랑한 기억까지도 망가뜨린다. 누군가를 차기도, 누군가에게 차여보기도 했지만 외도에 의한 이별에는 차원이 다른 괴로움이 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이런 멍청하고 신뢰할 수 없고 인간 말종의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이전에는 잠들기 전 떠올리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던 연애의 기억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아직 차마 사진을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인형뽑기 기계가 보일 때마다 전 애인이 뽑아주었던 인형들도 사실 아직 버리지 못했다. 비닐봉지에 꽁꽁 묶어 베란다에 방치해두었다. 손편지도 선물들도 대부분 아직 그대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기만 했다. 그 모든 물건들과 추억들이 어디 있는지 매 순간 느끼지만 모르는 척하며 없는 존재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다 그게 눈에 띄는 날은 오늘처럼 아프고 괴롭겠지. 하지만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아갈 용기는 아직 나지 않는다. 침대 밑에 쑤셔 넣어 두고 마법처럼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싶다.
대신 5년 전에 그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신나서 ‘연애 중’으로 저장해두었던 페이스북 설정을 바꿨다. ‘연애 중’ -> ‘싱글’로 바꾸니 친절한 페이스북이 ‘전 연인을 거리감 있게 설정하겠냐’고 물어봐줬다. 아마 추억 속 사진이나 '알 수도 있는 사람'에 그를 띄우지 않는 설정인 것 같다. 요즘 아무도 페이스북은 하지 않을 테고 나도 몇 년 만에 처음 들어갔지만 거기서라도 그를 멀찍이 떼어놓은 것이 작은 발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를 아주아주 멀리 떨어뜨려달라고 페이스북에게 부탁했다.
선샤인 클리닝이 필요해
영화 ‘선샤인 클리닝’은 두 자매가 자살 사건 현장을 청소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렇게 설명했을 때 느껴지는 것보다는 훨씬 잔잔하고 소소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그들이 하는 일은 유가족이 보기 힘들 자살 현장을 대신 청소해주고, 전문적인 위생 처리까지 하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도 그들이 필요하다. 피 튀기며 잔인하게 살해된 내 연애의 현장을 누군가가 대신 깨끗하게 청소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다고 슬픔이 가시진 않겠지만 한결 쾌적해진 마음으로 내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표지 이미지 : <무민 코믹 스트립 1>_토베 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