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으면 상처를 준 쪽일 테니
5년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 열렬한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깊이 사랑해서, 내 모든 걸 내려놓고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그런 건 좀 꿈같은 얘기 아닌가? 하고.
전 애인과 사귀는 5년 동안 그 불신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이런 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구나. 누군가를 돌보고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 꽤 즐거운 일이구나. 긴 시간 동안 신뢰를 쌓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한 것이구나. 탄산수 같은 연애 초기 뒤에는 이렇게 사골국 같은 오래된 관계가 펼쳐지는구나.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연애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진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좀 바보 같아진다는 걸. 쿨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헤어지기 1~2주 전 아직 행복했을 때,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다가 뜬금없이 ‘이 연애를 하기 전의 나는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부터 십몇년간 혼자 살았고 매 순간 혼자임을 느껴왔다. 하지만 그와 사귀고 난 뒤 요 근래 몇 년간 나는 더 이상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그와 함께 있는 것 같았고 우리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를 사랑하게 되어서 꽤나 행복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핑크빛의 초여름 노을 아래 버스는 집에 거의 다 와가고, 나는 행복에 겨워 약간 울었던 것도 같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외도의 증거를 발견하고 헤어지자 말한 뒤 그를 집에서 내보낸 순간 나는 버스에서 했던 생각들을 떠올렸다. 가장 두려운 것은 철저히 외로웠던 때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를 잃었으니 5년간 쌓아왔던 좋은 마음가짐과 행복감까지도 모두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다시 5년 전의 고장나고 비틀린 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나는 지금 그대로의 나로 남아있고
이별 3주 차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 내 상태를 점검해보건대 5년 동안 깨달은 것들은 다행히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5년 전의 나라면 지금 회사는 그만두고 술은 진탕 퍼마시고 이미 그에게 연락도 열댓 번은 했고 클럽을 전전하다가 길바닥에 드러누워있을 것이다.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좋은 연애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자제력 있게 자존감을 지키며 이별을 잘 감내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도 진정한 사랑이 올까?’ 물어보면, 이전에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걸?’이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나의 얄팍한 사회성이 간신히 입을 막아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구든 언제든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그런 사랑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든 그 사랑이 너를 배신할 수도 있다.
내가 사랑을 준 쪽이었음에 한편으로 감사한다. 받기만 하고 고마움을 모르다가 결국 배신한 쪽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난 ‘이번 연애도 실패군’ 이라며 줄을 긋고 쉽게 뒤돌아섰을 것이다. 그리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마음도 있다는 걸, 이렇게 뜨겁고도 괴로운 감정이 있다는 걸 몰랐겠지. 그걸 너무 늦지 않게 알게 되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보석함의 뚜껑을 잘 닫기 위해
연애 조언자인 편집장 언니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보석함의 뚜껑을 닫는’ 일이라고 했다. 수없이 그 뚜껑을 어긋나게 닫아봤다는 언니는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열심히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연애가 끝난 뒤 그 연애에서 얻은 좋은 것들을 차곡차곡 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추억을 대충 담아서 닫아두었다가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불쑥 뚜껑이 열릴 수도 있다. 또는 뚜껑을 잠그지 않고 대충 덮어두면 제멋대로 감정을 흘리고 다닐 수도 있다. 그러니 튀어나오지 않게 개어서 넣고 뚜껑을 잘 닫아두라고. 서두르지 말고 제대로 그 과정을 마치라고. 그 모습을 상상하니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장면같아서 이별의 과정이 좀 덜 외로워졌다.
끝이 어이없긴 했지만 내 연애는 꽤 괜찮았다. 모든 걸 차치하고 나는, 나만은 그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다시 돌아가도 나보다 더 그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 더 아프긴 하지만 나의 지난 시간들은 참 찬란했고 행복했다. 덕분에 지금 닫고 있는 것이 보석함일 수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전 애인이 아니고 그를 사랑했던 내 마음이기에, 그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었어도 내 마음만큼은 그대로 보석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픔과 슬픔이 가시면 열어볼 수 있는 것이 누추한 종이상자가 아니라 보석함이라서, 보석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