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질하지만 버릴 수 없는
바보 같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
아주 바보 같은 생각들
매일 혹시나 그가 찾아올까 : 전 애인이 내 집에 들어가기 전 언제나 담배를 피우던 장소가 있다. 매일의 퇴근길에 ‘혹시 그가 말없이 찾아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에 그곳을 흘깃 훔쳐본 뒤 집에 들어갔다. 연락도 없는 사람이 집 앞에 찾아왔을 리도 없고, 왔다 해도 할 말이 없는데. 나는 내심 그가 찾아와 주길 바라는 걸까?
카톡 지옥 : 카톡이 왔다고 알림이 뜰 때마다 그가 애원하는 카톡을 보낸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바보 같고 말도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일단 카톡에 빨간 동그라미 1이 뜨면 그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21세기 직장인이기에 카톡은 하염없이 오는데 그때마다 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아주 미쳐버릴 지경. 다행히 요 근래 며칠은 이 미친 생각을 점점 안 하기 시작했다. 휴 다행.
10년 뒤쯤 : 이렇게 그와 헤어진 뒤 10년 뒤쯤 갑자기 연락 오는 게 아닐까. 나를 아직 잊지 못했다며,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었다며. 그래 봤자 아무 의미 없지. 아는데도 자꾸만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상상 속 우리의 모습이.
자의식 과잉 :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볼 때마다 이별 얘기를 꺼내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다. 시시콜콜 물어보고 괜찮냐고 걱정하면 어떡하나. 사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이별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 비대해진 자의식이 만들어낸 쓸데없는 걱정.
운명에 맡기고 싶어 : 평생 신점이나 사주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운명을 전혀 믿지 않는다. 하지만 헤어지고 난 뒤에는 용하다는 신점이나 하다못해 타로라도 보고 싶었다. 가서 내 인생에는 앞으로도 차고 넘칠 남자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걸림돌 같은 남자였으니 버리길 정말 잘했다는 칭찬을 해줄 것 같았다. 그 반대의 이야기(그가 내 운명이었다는 둥 앞으로 남자는 씨가 말랐다는 둥)를 들으면 깔끔하게 무시할 자신도 있었다. 그 돈으로 술이나 사 먹자는 생각으로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다.
좀비 세상 : 세상에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상을 자주 한다. 그때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해서도 열심히 연구하는 중.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좀비 세상이 되면 그가 나를 데리러 와주기로 약속했다. 이제는 좀비 세상이 되어도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끔 서글퍼진다. 미리 식량이라도 비축해두어야 하나.
내가 크게 다치면 : 손만 살짝 베여도 걱정해주던 서로가 이제는 죽어도 올까 말까 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아주 크게 다쳐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계단에서 구르거나 차에 살짝 치여서 그가 알게 되면 나를 걱정할 정도로만. 물론 그러지 않을 거지만 솔직히 5년 전의 나였다면 이 생각에 좀 더 깊이 빠져있었을 것이다. 내가 좀 더 현명해졌음에 감사한다.
다이어트 욕심 : 식욕은 2주를 좀 넘긴 시점에서 거의 원상 복귀되었다. 튼튼한 나의 입맛. 막상 다시 배가 고파지니 허기를 못 느끼던 2주간의 편의가 그리워졌다. 이 기회에 살이 좀 빠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게다가 실연을 당했는데 얼굴이 좀 핼쑥해 보여야 어울리지 않을까? 이렇게 잘 먹어도 되는 걸까?(우적우적) 저녁은 좀 굶어볼까?
슬퍼하는 데에도 체력이 필요하더라. 실연을 활용해 다이어트를 해볼까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거기 당신,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당장 밥을 챙겨 먹자. 힘내서 끝까지 건강하게 슬퍼할 수 있도록.
*표지 이미지 : <Hurricane>_David Wies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