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마음은 어쩌면 오래전에 이미
사귀는 내내 우리의 관계가 나무랄 데 없이 돈독하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많이 하는 커플이었고 속마음을 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외도로 인한 이별은 내 생각이 틀렸다는 반증이었다. 상대의 외도에 나의 잘못도 있다는 진부한 자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관계가 삐그덕거렸음에도 내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우리의 관계에 만족하면서 동시에 외도를 저질렀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즉 그는 나만큼 행복하지는 않았거나, 외도를 통해 충족하고자 하는 또 다른 욕구가 있었다.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헤어진 뒤 얼마간은 행복했던 나 자신이 푼수처럼 느껴졌다. 남자친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혼자 행복에 겨워서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구나. 나의 사랑한다는 말이 그의 귀를 얼마나 의미 없이 스쳐갔을까. 그의 사랑한다는 말은 얼마큼 거짓이었을까. 사랑받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혼자 머리에 꽃 달고 즐거워하는 미친 사람과 뭐가 달랐을까. 대체 왜 그의 사랑을 그토록 확신했을까.
‘세심한 관찰자’ 능력치를 가질 수 있을까?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는 주인공 ‘유미’가 남자친구의 힘든 상황을 모른 채 헤어졌다가 뒤늦게 알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경험을 통해 유미는 ‘세심한 관찰자’라는 연애 능력치가 새롭게 생긴다. 처음 이 웹툰을 볼 때는 ‘유미가 남자친구 상황을 알아채지 못해서 헤어졌다는 뜻인가?’ 하고 맘이 좀 불편했다. 이제는 그게 어떤 상황인지 조금 더 명확히 알겠다. 과거에 상대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걸 관계가 끝난 뒤에야 깨닫는 순간이다. 세심히 관찰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알아채는 눈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이 길러진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대체 누가 자신의 연애 중에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
내가 전 애인의 상황에 무감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그의 무심함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거는 횟수보다 내가 그에게 전화해서 받지 않은 횟수가 더 많았다. 일 때문이었다고 했지만 헤어진 뒤 알고 보니 그는 그 시간 동안 대부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오직 주말밖에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그 주말마저도 일요일은 일정이 생겼다며 오직 토요일만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역시 헤어진 뒤 알고 보니 일요일에도 그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만날 수 있는 요일이 줄어들고 전화를 받지 않을 때마다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만과 불안을 열심히 내리눌렀다. ‘바빠서 그럴 거야’, ‘그는 나를 사랑해’라는 혼잣말을 되뇌며. 내가 그렇게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그는 결국 게임에서 만난 사람과 바람을 피웠다.
사귀는 동안은 남자친구에 대한 험담을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헤어진 뒤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그런 상황을 토로하자 하나같이 ‘왜 진작 그를 의심해보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친구가 나에게 얘기했어도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그걸 왜 알아채지 못했어’ 하고. ‘누가 봐도 뻔하지 않나?’ 하고.
그와 사귀고 있던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진실이었다.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김영하의 에세이집 <여행의 이유>에 나오는 문장이다. ‘여행’을 ‘연애’로 바꿔도 완벽하게 맞는 말이다. 연애는 끝난 뒤에야 어떤 연애였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관계 속에 있을 때는 자신의 관계를 절대 객관화해서 볼 수 없다. 외도를 저지른 연인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배우자에게 매 맞는 사람들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내가 사실은 받고 있지 않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한 것도 자신의 연애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든 자신의 연애에 대해서는 객관적일 수 없다. ‘세심한 관찰자’ 능력치를 10번 얻는다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다른 누구를 만난다 해도 상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변질된 관계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관계에 삐그덕거림이 생긴 것 같다는 신호를 느끼면, 그걸 애써 무시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신호를 면밀히 살펴보고, 상대와 그에 대해 얘기를 해보려 노력하고, 어쩌면 좀 더 빨리 문제를 발견하거나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거기서 오는 씁쓸함과 순진함 끝에 겪는 절망 중 어떤 것이 더 아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표지 이미지 : <Eep!>_Jake Van Leeuw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