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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Feb 26. 2020

27살 D의 노란 꽃 타투

같은 뿌리 다른 꽃

D가 생각하는 가장 그녀 다운 옷


노란색 잔꽃무늬가 있는 나시 미니원피스

얇은 스트랩의 검은색 가죽 슬리퍼

검은색 미니 크로스백

앞머리 있는 히피펌을 높게 묶은 포니테일

얇은 발찌와 목걸이




D의 첫 타투는 저의 선물이에요. 타투를 직접 그려준 건 아니고 돈만 대신 내줬어요. 각자 좋아하는 꽃을 같은 타투이스트에게 그려달라고 했는데 결과물은 완전 정반대. 분명 둘 다 꽃이긴 한데. 한쪽은 어둡고 거친 크레파스 느낌의 빨간 양귀비, 한쪽은 옅은 물감으로 칠한 듯한 노란 미나리아재비예요. D는 그런 노랗고 작은 꽃 같은 사람입니다.


함께 태국 여행을 갔었는데 그게 D의 첫 해외여행이었어요. 제가 방콕을 간 이유는 오직 하나, '방콕 여행자 거리에서는 밖에서 춤을 춘다더라'는 얘기 때문인데요. 양쪽 가게에서 들리는 음악을 배경으로 길거리에서 춤을 출 수 있다니 흥의 민족으로서 도저히 안 갈 수 없다고 생각했죠. 비행기 표를 예매하려는데 D가 자신을 꼭 데려가라며 저를 붙들었어요.

D가 큰 이견없이 저의 모든 계획에 따랐기 때문에 해외여행에서 흔히 겪는다는 동행과의 트러블은 전혀 없었어요. 거의 모든 일을 제가 결정하고 D는 선량하게 따르는 구조였죠. 그래도 D가 있어서 쥐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새벽 귀갓길에도, 구명 튜브를 몰래 타고 놀던 호텔 수영장에서도 안심이 되었어요.


문제는 여행자 거리에 갔을 때 터졌어요. 너무나 큰 기대를 가지고 여행자 거리에 입성해서 맥주도 한 병 마시고 이제 춤을 춰볼까- 하고 있는데 글쎄 D가 곧 죽어도 춤을 안 추겠다는 거예요.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서는 절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같이 간 사람이 아메리칸 갓 탤런트 감독관처럼 앉아있는데 흥이 나냐고요. 혼자 몇 번 흔들거리다가 들어와서는 D에게 '너는 여기까지 와서 대체 왜 춤을 안 춘다는 거니!' 하고 타박을 했던 기억이 나요. D도 그렇지만 저도 어렸을 때였거든요. D의 대답은 생각이 안 나고 그때 느낀 저의 순수한 분노만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그 뒤로 몇 년이 지난 지금 D는 첫 타투 이후에도 두 개의 타투를 더 했어요. 태국에서 자기가 왜 춤을 안 췄을까? 하고 웃기도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함께 그리스를 여행했는데 저보다도 술을 잘 마시는 흥부자가 되었더라고요. 클럽에서 나가려고 하지를 않더라고요? 저는 그동안 그만큼 나이를 먹었는지 이제 춤은 안 추게 되었는데 말이에요.


6살의 나이차 외에도 D와 저는 정말 다릅니다. D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에 모두 드러내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유달리 강한 저와 달리 D는 좀 더 부드럽고 물렁한 편이죠. D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쉽게 마음 아파하며 부모님에 대한 애틋함도 강합니다. 저는 아이라면 질색하고 차갑고 부모님에게도 살갑지 않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D가 저를 닮아가는 부분도 있어요. 조금 더 유흥을 즐긴다든지, 절대 안 읽던 책을 읽는다든지요. D와 저의 차이는 어쩌면 그저 시간 차이였을 뿐일까요? 6년이 지나면 D는 오늘의 제가 되는 걸까요?


아닐 거예요. 6년 전의 저에게는 지금의 D와 같은 선량함은 없었거든요. 좀 더 악에 받치고 불안정하고 차가웠죠. 6년 뒤의 D는 지금의 저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덜 공격적인 사람일 거예요. 먹성이나 외모가 닮았어도 D와 저는 근본적인 마음의 온도가 다릅니다. 저는 D를 보며, 만약 내가 좀 더 어리고 부모님과 돈독하며 현실적이고 정이 많았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발견합니다. D도 저에게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까요?


오랜 시간을 함께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결점과 실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럴 때마다 서로 '나라면 다르게 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여요. 실제로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부분에서 실수를 저질러요. 연애 방면에서는 내가, 직장에선 D가 문제가 생기는 식이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한 뒤 굳게 비밀을 지키고 무덤까지 가져갑니다. 이젠 서로 지켜주고 있는 비밀이 몇 개인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는 아주 다르지만,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오랜 시간 같은 토양에서 같은 공기를 먹고 자랐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언제나 신기하고 재밌어요. 비슷한 얼굴로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진 그녀가 저에게 보내는 애정이 기껍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다를 테지만, 언제까지나 가장 친한 친구로 남을 거예요. D는 저의 한 명뿐인 동생이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가장 D 다운 옷


알프스 하이디 같은 펌퍼짐한 롱 원피스, 베이지색 꽃무늬

보풀이 일어난 루즈핏 갈색 코트

레이스업 앵클부츠

라코스테 가죽 쇼퍼백

풀어헤친 히피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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