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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Feb 24. 2020

36살 H의 하이힐과 소주잔

당당하고 허술한 선배

H가 생각한 가장 그녀 다운 옷


가보시 있는 킬힐

어두운 색의 루즈한 티셔츠

블랙 미니 스커트

보이프렌드 핏 재킷

체인 스트랩의 박스백




5cm 이상의 높은 굽을 신는 사람은 생각보다 극히 드물어요. 주변에서 딱 한 명, 오직 H만이 킬힐을 실생활에서 신는 여자입니다. H는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스틸레토 힐을 또각또각 신고 출근하고, 몸이 피곤한 날일 수록 불편하고 예쁜 옷을 입어야 긴장감이 생긴다고 말하곤 합니다. 게다가 하이힐을 신고도 오래 걷거나 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요. 걸음도 빠른 편이라 운동화를 신은 채로도 힐을 신은 H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H는 저의 첫 회사에서 3년을 함께 다닌 상사예요.  입사 직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고 머쓱한 며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퇴근하기 직전 들른 화장실에서 H를 마주쳤어요. 저녁이었는데도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메이크업에 립스틱을 덧바르고 있던 H는 대뜸 저에게 '소바 좋아하냐'고 묻더라고요. 얼떨결에 '네에 좋아해요..' 하고 대답했더니 다른 팀원들과 함께 저녁 먹고 퇴근할 건데 함께 하자더군요. 그날 소바를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유독 화장실에서의 H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만큼 소바 제안은 참 뜬금없었고 격의도 없었어요.


그 후로 3년을 함께 일하면서 H와 저는 둘도 없는 선후배이자 친구 관계가 되었어요. 제가 퇴사했다가 다시 입사했다가 다시 퇴사하는 곡절을 겪은 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요. 우리는 일상을 나누고 술을 마시고 서로의 남편과 남자친구를 스스럼없이 만납니다.


H가 보기보다 빈틈이 많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킬힐을 신고 스모키 화장을 하고 무표정으로 모든 이를 깔볼 것처럼 생겨서는 사실 농담을 좋아하고 사투리를 잘 쓰고 허술한 면도 많은 여자더라고요. 은근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랄까요. 한 번은 H의 남자친구가 저에게 'H는 참 남에게 일을 잘 시킨다'고 푸념하더라고요. 일부러 일을 시킨다기보다는 급한 성격에 어수선함이 더해져 '이것 좀 가져와줄래' '저걸 네가 해볼래'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와중에도 남자친구는 H가 부탁한 물병을 옮기고 있었어요.


저는 수많은 술자리를 H와 함께 했어요. 일 끝나고 한 잔, 주말에 집 근처를 지나는 김에 한 잔. 다음날에는 함께 숙취에 시달리며 '우린 대체 술을 왜 마시는 걸까?'에 대해 토론하곤 했죠. 숙취가 가시면 다시 까맣게 잊고 소주잔을 비웠지만요. 하루 종일 함께 일했으면서도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지, 딱 한 병만 먹자던 우리의 약속은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죠. 여름에는 차가운 소주, 겨울에는 따뜻한 정종을 앞에 두고 연애와 일, 평생 단 한 가지의 음식만 먹으면 뭘 먹겠냐는 등의 별의별 주제가 튀어나와요. 3년 내내 갔던 술집은 허름하고, 달걀 후라이를 서비스로 주고, 사장님이 술에 취해있는 날도 있던 곳이에요. 지금은 망했는데 언젠가는 사장님이 다시 술집을 차리고 문자를 보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곧 도착하니 안주를 미리 요리해달라'고 문자 보낼 만큼 단골이었거든요.


H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도 걸레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해요. 그녀가 처음 입사했던 패션잡지의 편집장이 하던 말이래요. 차려입었지만 그 옷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어떤 상황이든 솔선수범할 수 있는 사람이겠죠. 그리고 실제로 H는 그런 사람이에요. 구두를 신고도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미니스커트를 입고도 망설임 없이 불편한 의자를 자처해요. 저도 비싼 옷을 입은 날, 얼룩이라도 묻을까 노심초사하다보면 가끔 그 말이 생각나요. 그럼 조금 더 의연해질 수 있어요.


영화 '어바웃 타임'에는 모델 케이트 모스의 짱짱팬인 여자 주인공 메리가 등장합니다. 메리는 케이트 모스를 '아무리 최신 패션을 주도한다 해도 여전히 해변에 벌거벗고 누워 있던 귀엽고 평범한 여자'라고 묘사해요. 제가 생각하는 H도 정확히 그런 사람이에요. 화려한 구두를 신고 있다가도 금세 맨발로 함께 한강 수영장에 뛰어들 수 있는. 물론, 그 구두는 어딘가 약간 닳아 있어야 해요.



내가 생각하는 H 다운 옷


하얀색 면 반팔 크롭티

타이트한 블랙 핫팬츠

검은색 쪼리

카키색 캡 모자

양쪽 귀에 커다란 링 귀걸이

알이 큰 까만 선글라스

버건디색 매니큐어 바른 손톱, 약간 벗겨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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