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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Feb 29. 2024

안 아픈 손가락

착한 아이 증후군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다. 잘 만든 드라마는 소문이 빠르다. 나는 드라마보다 영화를 즐긴다. 한편으로 깔끔하게 끝내고 싶어서다. 드라마 흥행 조건은 재미와 공감이다. 이런 조건이 정주행의 늪에 빠트린다. 정주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다음날 일상이 틀어진다. 그럼에도 결국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시작하고 말았다. 그리고 매 회 몰입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볼 때 셋째 언니가 제일 많이 생각났다. 그리고 배우들 연기에 우리 가족이 겹쳐 보였다. 우리는 간호사 박보영처럼 정상과 우울의 경계를 줄타기하며 셋째 언니를 돌보거나 수 간호사 이정은처럼 환자 가족이라는 사실을 함구한다. 핏줄의 의무 거나 상황의 애처로움에도 마음과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존재한다. 

                                    



내 눈에 셋째 언니는 안 아픈 손가락이다. 엄마는 펄쩍 뛰겠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눈치껏 처신하는 나와 달리 셋째 언니는 독심술로 자기를 알아주길 바라는 타입이다. 징징대고 졸라도 나올까 말까 한 형편에 말 한마디 던져 놓고 처분을 기다리는 요령부득인 사람.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말을 끊고 대야를 걷어차거나 대문을 쾅 닫는 걸로 뜻이 다 전달됐다고 믿는 단순한 사람. 상대가 내 맘을 알아주면 있는 거 없는 거 다 퍼주는 계산 없는 사람이 우리 셋째 언니다. 엄마는 그런 언니를 답답해했고 속이 터진다고 무시했다.

 

그때 네가 얄미워 죽을 뻔했어. 언니가 오래된 기억을 꺼냈다. 그 말을 들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오빠가 우리에게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신나 했던 기억이었다.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동네는 유독 언덕이 많았다. 전날 많은 눈이 내렸다. 그때는 제설작업이란 게 없으니 밤 사이 눈은 언덕길에 그대로 얼어 밑창 닳은 운동화가 감당할만한 수준을 넘어섰다. 나는 길에서 자빠지지 않으려 오빠 팔에 매달려 대롱댔다. 그럼에도 넘어질 듯 말 듯한 상황이 자꾸 이어져 그때마다 깔깔 웃음보를 터트렸다. 그 때 언니가 눈이 찢어지게 나를 쳐다봤는지, 그 일로 열등감에 더 빠졌는지 나는 알 바 없다. 나는 내 성향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당시 셋째 언니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다. 갈 수 있는 학교는 남녀공학 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남녀 공학은 나쁜 물이 들 수 있다는 논리로 언니를 고등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았다. 구태의연한 시절이었다. 나라면 생떼를 썼을 상황인데도 언니는 받아들였다. 없는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기적 성향이든 저항의 깡다구든 갖춰야 하는데 언니 주변머리는 그러지 못했다.


애 학교도 못 보내는데 무슨 고사떡이에요.

엄마는 해마다 고사떡을 만들어 동네 집집마다 돌렸다. 셋째 언니가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그 해도 엄마는 고사떡 준비를 했다. 그 상황을 하필 효자 아들이 제동을 걸었고 마을 공용 우물가에서 쌀을 씻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씻고 있던 쌀을 그대로 엎었다고 했다. 훗날 오빠는 그 사건의 전모를 전하면서 쌀을 엎는 엄마에게 속정이 떨어졌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우리도 이 정도는 하고 산다는 표식, 고사떡은 자존심의 표시였을 것이다. 엄마가 아무리 성실하게 자존심을 표시 내도 우리 집 가난은 변화가 없었다.


엄격했지만 츤데레처럼 동생들을 챙겨주던 오빠, 셋째 언니의 오빠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셋째 언니는 오빠가 편들어준 몇몇 사건에 기대어 오빠 사랑을 마음에 새겼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오빠의 관심을 수줍게 받는 한편 고등학교에 못 간 억울함을 긴 반항과 방황으로 표를 냈던 언니. 아마 엄마를 겨냥한 반항이고 단절된 길을 찾기 위한 방황이었을 것이다.


방황을 마친 언니가 돌아와 결혼을 했다. 언니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 회사 내에서 인기 많은 형부에게 단지 오빠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호감을 느꼈다. 어떤 용기가 언니를 부추 켰는지 모르지만 언니는 부부의 연을 만들었다. 이름이 같다고 결혼까지 하다니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신뢰를 보내는 성정. 그게 자신의 미래를 담보하는 일일지 아닐지를 따지지 않는 단순함, 옳다고 믿으면 옆을 보지 않고 직진만 하는 무서운 용기를 보이는 사람이 우리 언니다.


셋째 형부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정 결핍인 언니입장에선 고리타분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오빠를 좋아하듯 형부를 좋아했던 언니는 적성을 찾은 듯 피나는 살림을 살면서 형부에게도 시댁에도 최선을 다하는 걸로 마음을 올인했다. 시 할머니가 돌아가신 겨울, 우물물을 길어 초상집 호스트를 하느라 갈라진 손등이 터져 피가 맺힌 상황에서도 달맞이꽃처럼 웃던 결혼 초기의 언니가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오빠와 이름이 같은 인기 남, 그런 사람이 내 차지가 됐으니 언니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언니가 돌연 예전 반항아 시절로 돌아갔다. 서로의 콩깍지를 벗었으나 여전히 결혼은 생활 속에서 무르익던 해였다.




애 학교도 못 보내는데 무슨 고사떡이에요.

엄마는 해마다 고사를 명분으로 떡을 만들어 동네 집집마다 돌렸다. 셋째 언니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그 해도 엄마는 고사떡 준비를 했다. 그런데 하필 효자 아들이 엄마 자존심을 건드렸다. 마을 공용 우물가에서 쌀을 씻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씻고 있던 쌀을 그대로 엎었다. 훗날 오빠는 그때의 사건 전모를 전하면서 쌀을 엎는 엄마 태도에 속정이 떨어졌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우리도 이 정도는 하고 산다는 표식, 떡은 자존심의 표시였을 것이다. 엄마가 아무리 성실하게 티 내도 우리 집 가난은 변화가 없었던 걸 봐도 기복과는 무관하다.


엄격했지만 츤데레처럼 동생들을 챙겨주던 오빠, 셋째 언니의 오빠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셋째 언니는 오빠가 편들어준 몇몇 사건에 기대어 오빠 사랑을 마음에 새겼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언니는 오빠의 관심을 수줍게 받는 한편 고등학교에 못 간 억울함을 긴 반항과 방황으로 표를 냈다. 아마 엄마를 겨냥한 반항이고 단절된 길을 찾기 위한 방황이었을 것이다.


방황을 마친 언니가 얌전한 사람으로 돌아와 결혼을 했다. 언니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 회사 내에서 인기 많은 형부를 단지 오빠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호감을 느낀 언니. 어떤 용기가 언니를 부추 켰는지 모르지만 언니는 부부의 연이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름이 같다고 결혼까지 하다니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신뢰를 보내는 성정. 그게 자신의 미래를 담보하는 일일지 아닐지를 따지지 않는 단순함, 옳다고 믿으면 옆을 보지 않고 직진만 하는 무서운 용기를 보이는 사람이 우리 언니다.


셋째 형부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애정 결핍인 언니입장에선 고리타분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오빠를 좋아하듯 형부를 좋아했던 언니는 적성을 찾은 듯 피나는 살림을 살면서 형부에게도 시댁에도 최선을 다하는 걸로 마음을 올인했다. 시 할머니가 돌아가신 겨울, 우물물을 길어 초상집 호스트를 하느라 갈라진 손등이 터져 피가 맺힌 상황에서도 달맞이꽃처럼 웃던 결혼 초기의 언니가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오빠와 이름이 같은 인기 남, 그런 사람이 내 차지가 됐으니 언니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언니가 돌연 예전 반항아 시절로 돌아갔다. 서로의 콩깍지를 벗었으나 여전히 결혼은 생활 속에서 무르익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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