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단편이고 인생은 단편집이야. 그리고 난 네 편이야.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나는 "그 업보가 다 네 자식에게 간다"고 잘근잘근 되씹는다. 퍽 무서운 말인 게 첫 번째, 자식도 없는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꽤나 발칙한 일이며, 두 번째, 남의 자식을 운운한다는 것은 일종의 '파렴치한' 일인 것이다. 세 번째, 사랑의 무서움을 아는 자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김복희 시인의 <귀신 하기>라는 시에서도 알 수 있다. "많이 좋아하면 귀신이 돼".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살아 숨쉬고 있는 산 사람을 기어코 무자비하게 파리한 귀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도 쏙 빼둔 채 그저 사랑하는 것만을 제일 먼저 생각해내고 찾아다니며, 쫓아다닌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제제가 한 말도 떠오른다. "제 마음 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사랑을 하면 귀신이 되지만 사랑을 그만두어도 죽은 존재가 된다니, 사랑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다. "네 업보는 네가 아닌 네 자식에게 간다"는 말은 결국 "나를 괴롭히고 부당하게 대우하는 너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네 사랑이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와 같은 말이니 말이다.
사랑은 존재에 약점이 된다. 더더욱 피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사랑은 용의주도하다. 어느새 스며들어 존재를 귀신으로 만들어버린다. 요즈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의 심산인지 우리 모두 사랑을 장려하고 있다. 인문학의 부재만큼이나 사랑의 부재 또한 심각한 상황이라나 뭐라나. 그래, 해도 귀신, 안 해도 죽은 목숨일 바에 차라리 귀신이 되는 게 낫겠다. 일단 이미 생겨버린 약점 두어 개를 양 손에 가득 쥔 채 고양이 사료를 가득 채우러 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