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필적 글쓰기 Mar 11. 2016

벌레 전성시대

희생양에 분사되는 언어의 살충제


  벌레, 좋아하세요? 아니오. 

나는 벌레를 분명히(!!!) 싫어한다. 성충이 아직 덜된 유충만 보고도 온 몸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친다. '저것'이 성장해 내게 가할 해害를 진작부터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벌레에 호되게 당한 경험은 없다. 그래 봤자 세 끼 밥 챙겨 먹듯 예사로 물리는 모기 정도. 모두가 비슷할 것이다. 벌레를 애정 해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집 안 모퉁이에서 발견되는 벌레는 '죽여야 할' 대상이고, 집 밖 도처에서 목격되는 벌레는 '피해야 할' 대상이다. 나는 집 내외에서 죽이고 피해야 할 벌레가 참 많기도 한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아직 겨울이라는 게 당장의 위안일 뿐이다.



 이상한 건, 피해야 하는 벌레만큼 피해야 할 사람들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미 '벌레'라고 불린다. 충蟲시대의 서막은 일베충이 올렸다. '일베충'은 온라인 사이트 일간베스트의 회원들이 행하는 온갖 잡태를 비난하는 언어로는 아주 맞춤이었다. 이후 온라인에서는 지탄의 대상 뒤에 붙는 '충蟲'의 접미사는 흔한 단어가 되었다. 일종의 신조어였다. '이 벌레 만도 못한!'의 힐난과 상통하는 재치처럼 보였다. 맘충, 급식충, 학식충, 한남충, 카페충, 틀딱충 등 다양한 벌레가 2막 3막 4막에 차례로 출연했다. 그리고 현재로선, 종막의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엔 '인간의 벌레화化'가 성행 중이다. 



 '충'의 꼬리표에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제 자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맘충, '공부는 안 하고 밥만 축내는' 급식충과 학식충, '한국 여자를 싸잡아 김치녀로 비하하는' 한남충, '도서관 가지 않고 카페에서 공부하면서 대화하는 사람 눈치 주는' 카페충, '틀니 딱딱 부딪히는 노인'을 비하하는 틀딱충은 이 중에서도 압권이다.



 물론 그릇된 행위엔 비난이 가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유'가 언제나 '행위'를 변호해주진 못한다. 특히 이유는 고작의 빌미가 되고 '비난의 행위'가 유일한 목적인 경우엔 더 그러하다. 백화점과 식당에서 만나는 모든 엄마들은 식당 문턱을 넘기도 전에 '맘충'의 혐오가 담긴 눈길을 받게 되고, 10 대란 이유로 급식충, 대학생이란 이유로 학식충, 카페에서 노트북 두들긴다는 이유로 카페충, 심지어... 늙었단 이유로 틀딱충이라니. 이렇듯 이유가 증발한 지대에도 '충'의 비난은 존재한다. 오직 비난의 형식만이 흉측하게 남았다. 더군다나 '-충'이란 농담의 형식을 빌려서, 아주 쿨한 듯 가볍게. 


 비난의 조항들은 얼핏 보면 아주 다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조항들의 획일성은 쉽게 드러난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에 나오는 대목이다. 나는 다음 구절에서 '충' 비난의 수면에 잠긴 획일성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희생양은 군중들이 불안과 분노를 털어놓는 배출구 역할을 한다.

군중들의 불안과 분노가 바로 비난의 획일적 이유다. 타인을 비난하고 고해 바침으로써 얻어지는 쾌감,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우월감, 우등 의식. 이 감정의 오르가즘을 위해 이 세상의 '충'들이 희생당하고 있다. 개인 내면의 황폐는 타인을 향한 비난으로 비화했다. 나는 타의로 벌레가 된 인간들이 어쩐지 희생양처럼 느껴진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나 '다른 상대'에게 명분 없는 분노를 뻗는다. 나는 애엄마가 아니고, 나는 10대가 아니며,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나는 굳이 카페에서 공부하지 않으며, 나는 노인이 아니라는 단순한 '차이'가 누군가에게 '박멸 의지'를 선사한 걸까. 그들은 언어의 살충제를 사람에게 뿌리고 있다. 기억해야 할 건, 그들은 벌레가 아닌 진짜 '사람'이라는 거다. 


역시나 그림판..


 만인이 벌레가 된 세상을 '인간계'라 할 수 있을까. 서로를 지나치게 갉아먹고, 티끌의 잘못에도 아니, 잘못이 없어도 '나와 다름'이 한낱 이유가 된 혐오가 만연하게 된다면 그곳이 곧 '피로사회'다. 여북하면 그런 모진 비난의 말을 뱉어낼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리 사람 마음이 궁하고 구차해도 상식의 링 밖을 벗어나면 '반칙'이다. 우린 이미 진짜 벌레만으로도 피곤하지 않은가. 왜 구태여 옆사람을 벌레로 만들어 자박自縛하는 걸까.


 

 우리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다. 살면서 부딪혀야 할 날 선 모서리들이 너무 많다. 매번 찔리고 다치지만, 화를 낸다고 해도 모서리가 둥글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속엔 화병이 쌓인다. 이 화병의 발원으로 내부에 모서리를 키우게 된다. 내부의 모서리로 외부의 모서리를 찍어 내야 하는데, 우린 외부의 견고한 모서리 대신 무너트리기 쉬운 서로의 무른 살점만 탐하고 있는 듯하다. 글을 쓰는 내내 나도 반성한다.  



 정당성이 증발해 메마른 땅에 맹목성의 비(난)만 내렸다. 나는 과거에 급식충, 학식충이었고, 현재 카페충이고, 몇 해 후엔 맘충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내 단출한 일생 중 몇 번이나 태態를 갈아 낀 건지 셈도 어렵다. 그리고 앞으로 재차 행해질 '변태變態'가 두렵다ㅠㅠ.




  

매거진의 이전글 제 3당 인 더 트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