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54일차
비가 온다. 우리 딸은 아직 맞아본 적 없겠지만 어린이날 비가 오는 게 30여년 만인가봐.
아빠는 비오는 날을 좋아해. 비가 오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그래. 아빠도 우리딸처럼 엄마 뱃속 양수에서 살다와서 그런가. 비가 땅에 튀는 소리, 비 오고 난 뒤푸른 하늘, 먼지 없이 멀리 보이는 것도 좋아한다. 빗소리를 틀고 자야 잠이 잘 오기도 해.
우리 딸이 태어나던 날은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봄 중에 드물게 깨끗하고 청명했었고 조리원을 나와 집으로 올 때는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지. 비가 차 천장을 때리는 백색소음에 딸이 잘 자면서 오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빗소리를 틀어주면 잘 자네.
비 오면 감자깡을 먹어보렴,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도 들어보고, 파전도 먹어봐. 큰 우산을 쓰고 국립현대미술관을 가보는 것도 좋겠다. 아니면 소양강에서 배를 타고 청평사를 가서 비를 맞거나 압구정 골목길에 가보는 것도 괜찮겠네. 글라스톤베리에서 진흙을 밟아보면 비가 싫어지려나. 장칼국수를 먹으러 수업을 째고 영동으로 떠나보는 재미도 누리길.
날씨마다 계절마다 추억을 가득 쌓으면 그 날씨가 떠오른다. 그날의 공기와 온도도 환기돼. 미세먼지가 심하고 폭염이 심해진 우리나라 환경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사실 화창한 날부터 눈오는 날까지 버릴 날씨 없지. 색다른 기억을 주는 날씨에 매일 고마움을 표하는 것도 잊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