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이야기- 차인 놈
프롤로그
괴상하다 못해 유별나고, 희한하다 못해 요상한 그것의 이름은 없다. 날카로운 눈매에 턱이 완강한 건축주는 건물이 완공되자마자 이름도 주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것은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고즈넉한데다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양중마을 뒤 언덕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집도 아니고 로봇도 아니었다. 굳건한 자세로 땅에 붙박여 있는 어떤 것이었다. 3.7평 정도의 넓이에 3.5m쯤 되는 높이의 건물은 짧은 다리와 두 팔이 있고, 커다란 머리에 눈과 입도 있었다.(두 개의 둥근 창과 위 아래로 난 네모난 창은 영락없이 건물의 이목구비였다.) 건물 외벽은 밝은 그레이 바탕에 블루와 그린, 그리고 핑크와 오렌지가 위 아래로 거칠게 지나갔는데, 별난 외양과 더불어 아주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의 입구는 불투명 강화 유리문이었고 눈을 들이밀고 들여다보면 안쪽이 보일 듯 말듯했다.
그것이 세워질 당시 주변 경관을 헤친다는 민원이 빗발쳤고, 여러 번의 무산 될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전위예술적 작품일까, 거대한 쓰레기통일까? 라며 대중의 입방아가 수도 없이 찍히는 가운데 그것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런데, 누가, 왜 이렇게 기괴한 건물을 세웠는지, 떠도는 이야기는 많다. 소문이란 덧칠되기 일쑤이고, 중요한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펄렁거리며 사방을 방방거리는 법이니 관심 둘 필요는 없다. 어쨌든 건물의 기묘한 분위기와 달리 그것이 세워지게 된 사연은 몹시 애달픈데, 그것은 다음에 듣도록 하자. 애달픈 사연을 말하다보면 감정이 격앙 될 수 있고, 자칫 감정에 매몰되어 사실을 호도할까봐 두렵다. 거세게 소용돌이치던 감정들이 시간의 다독이는 손길을 따라 차분히 가라앉았을 때 꺼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은 그것에게 달려가 쏟아놓았던 여러 스토리들을 만나보기로 하자.
첫번째 이야기- 차인 놈
그것은 사람들의 입에 바쁘게 오르내렸다. 멀리서 보면 황망히 눈을 부라리는 건물, 가까이에서 보면 익살꾸러기 광대, 삐딱하게 보면 덩치만 큰 멍청이 로봇……. 사람들을 제각각 보는 대로 또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다. 로봇처럼 생긴 집이라고 해서 로봇집, 이것이 왼팔을 들어 올려 검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며 검지코, 또 요란한 외양에 비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뜻으로 깡통이라고 불렀다. 이것의 용도와 사용하는 방법은 아무도 몰랐다. 문은 안에서 잠겼는지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불투명 유리문에 얼굴을 비벼 본 후 투덜거리며 내려갔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온 그는 대로 건너 양중마을 뒤로 불쑥 솟은 형상을 마주 보았고, 무의식중에 그것이 그의 고통을 위무해 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횡단보도를 두 번이나 건너 언덕으로 올라갔다. 비가 오기 때문인지 아무도 없었다. 괴상하게 생긴 건축물만 고개를 갸웃거린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철벅철벅 걸어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생긴 대로 깡통은 대책 없이 비만 맞고 있을 뿐 그의 고통을 조금도 덜어주지 않았다.
그는 흙탕물에 더러워진 채 슬리퍼에 꿰어진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주먹 만 한 빗방울이 무자비하게 발등에 내려꽂혔다. 돌풍까지 몰아쳐 와 나무들의 귀뺨을 정신없이 내갈기고, 그가 쓰고 있던 우산까지 확 뒤집어버렸다. 살대까지 부러져 아예 못쓰게 만들어버린 비바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앞뒤로 춤을 추었다. 깡통집은 처마도 없었다. 열이 벋쳤지만 그는, 그냥, 젖은 인생, 될 대로 되라지. 라며, 우산을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건물의 왼쪽 발가락이었다.
“아우, 아파! 이런 씨…”
그가 튕기듯 벌떡 일어서며 욕을 내뱉었다. 건물의 발가락은 쇠인데다 툭툭 불거져 있어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엉덩이뼈가 아팠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그는 발가락들을 파바박 밟았다. 번개처럼 뛰어 양쪽 열 개를 밟아대는 동안 유리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또 불이 들어왔다 나가고 삐비빅 소리도 났다가 꺼졌다. 그러니까 발가락은 버튼이었다.
먹구름이 사납게 몰려오더니 아예 동이 째 퍼부었다. 급한 대로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는 다시 발가락 위에서 널을 뛰었다. 오른쪽 세 번째 발가락을 밟자 문이 열렸다. 그는 몸을 굴러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센서가 작동했는지 불이 깜박 들어왔다. 기분 나쁘게도 빨간색이었다. 시뻘건 내장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섬뜩했다.
“이건 또 뭐야!”
부러 큰소리로 내뱉었다.
“겁도 없군. 겁도 없어.”
이게 무슨 소리? 분명히 들었다.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소름이 좍 등줄기를 탔다. 도로 나가려고 문을 미는데 안 열렸다.
“뭐야! 왜 안 열려! 문 열어!”
그가 외치며 유리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밖에 비오잖아. 가만히 있어. 안 잡아먹을 테니까아~”
베이스톤의 목소리가 노래 부르듯이 말했다. 그가 뒤돌아보았다. 텅 빈 실내, 아무도 없었다. 그럼, 누가 말했단 말인가? 이게 귀신 로봇? 머리끝이 쭈뼛 섰다. 그는 허겁지겁 다시 유리문을 밀었다.
“내가 열어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허둥거리는 거야?”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도 도대체, 누 누구야! 나와서 얼굴을 보이란 말이얏!”
그가 부르짖었다.
“나는 바로 이 집이야. 말도 하는 로봇트형 집이라고 할까? 아니면 말하는 기능까지 갖춘 하이테크 빌딩이라고 할까?”
“말도 안 돼. 어떻게 집이 말을 해!”
“어이, 거긴 21세기 문명인이 아니란 말씀인가? 버스도 말을 하고, 냉장고도 말을 하고, 하다못해 신발도 말을 하는 시대에 집이 왜 말을 못해!”
“그럼, 이게 집처럼 생긴 로봇이야? 아니, 아니, 진화된 로봇이냐고? 그러니까 인간과 감정까지 소통하는 미래형 로봇이냐고?”
“누가 날 더러 로봇이래? 널더러 생긴 게 기계인간 같다고 로봇이라고 부르면 좋아! 내 모습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난 로봇과는 비교될 수 없는 하이테크놀로지야! 아니지, 그것으로는 부족하지 상상을 불허하는 하이, 하이테크놀로지라고. 아, 초면에 너라고 하대를 해서 미안해. 우린 반 존경어로 서로를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안 그래?”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내가 날 밤을 새워 나의 역사와 형성과정과 내가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을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쪽이 다 이해할 거 같아? 그냥, 희한한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비도 오는데, 뭐, 놈팽이 같기도 하고 핸썸나부랑이 같기도 한 어떤 존재와 신세타령 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필요 없어. 문이나 열어줘!”
“우산도 없이 그대로 나갔다간 감기 몸살로 죽다 살아나야 할 걸? 그러고 싶으면 그러시든지.”
문이 열렸다. 정말이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지독했다. 기상이 미쳤거나 환영일지도 모르지만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 볼 배짱을 부릴 수 없었다. 그는 건물 안쪽과 바깥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안 잡아 먹는다니까아~. 그러려고 했다면 벌써 백 번도 더 해치웠을 걸. 내가 마음 먹으면 3초면 볼 일이 끝나거든. 흐흐흐흐흐……”
웃음소리가 끝내줬다. 음산하고 징그러운데, 희한하게도 공포 해제 발령처럼 들렸다. 목소리는 외롭다느니, 처음으로 낯선 대상과 말을 해보는 건데 이거 참, 재미가 쏠쏠하다느니,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경찰을 불러주겠다느니…… 라며 말도 안 되는 잡소리를 늘어놓았다. 문이 스르르 닫혔다. 알맞게 데워진 공기가 밀려들었다.
말하는 깡통집의 실내는 소박하다 못해 단조로웠다. 실내장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물론이고 작은 소품 한 점 없었다. 그러나 천장만은 특별하게도 유리로 마감을 한 덕분에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고인 물 위로 둥글게 둥글게 파문 지는 모습이 다 보였다. 창문 아래에는 몹시 푸근해 보이는 소파가 한 개 있었다. 소파 위 목재 벽면에 약간의 기계장치가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청년의 이름은 편도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 학생 신분이며 마을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편도진이 제 소개를 하자 목소리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낯선 음성으로 ‘무’라고 말했다. 그게 이름이야? 라고 도진이 묻자 목소리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아직 이름이 없다고 했다. 눈매 날카로운 건추주가 완성된 그를 보고 ‘무무군’이라고 읊조렸던 것을 기억해낸 거라고. 건축주가 아무 것도 없다. 란 뜻으로 말한 것인 만큼 그것은 이름이 아녔다. 한참 뜸을 들인 목소리는 ‘부루’라고 다시 말했다. ‘부루?’ 도진의 의문에 목소리는 ‘무엇이든 조금씩 사용하여 가늘고 길게, 오래 오래’라는 뜻인데, 이 단어가 처음 입력될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며 이름으로 삼겠다고 했다.
따뜻한 바닥에 눕자 사지가 데친 배추처럼 흐물흐물 늘어졌다. 등 따습고 졸리면 서글픔이 녹아든다던데, 다 그러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도진은 팔을 베고 벽 쪽으로 누웠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잔상들이 꿀럭거리며 올라왔다. 그는 긁는 일이 주입된 기계처럼 계속 바닥을 긁었다. 원목 바닥에 자국이 생겼다.
“초조, 불안, 갈등, 걱정, 번민, 괴로움, 열등감 등을 총망라해서 한마디로 표현하는 게 긁기지. 손톱 밑이 찢어지도록 긁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문제잖아. 차라리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보시지.”
부루가 슬쩍 건드렸으나 도진은 “됐어.” 라며 거절했다.
“내 뱃속에 들어 왔으니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뱃속과 나는 분리될 수 없으니까.”
부루의 채근이 이어졌지만 도진은 대꾸도 하지 않고 밖의 빗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괴상한 외양만큼 짜증나는 주둥이였다. 잠깐 적막이 흘렀고, 그 사이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다지오로만 이루어진 현악 사중주가 절박하게 흐느끼며 더듬어 올라왔다. 도진이 소리를 빽 질렀다.
“뭐하는 거야!”
“연설을 들을 준비나 하셔.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내 뱃속으로 들어온 존재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아, 몰라. 혼자서 씨부렁거리든지 말든지……”
도진은 아예 벽에 찰싹 붙었고, 부루는 나레이션처럼 목소리를 깔고는 자신이 그곳에 서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시간의 바퀴를 따라 변모해왔다. 문명은 발전을 거듭하여 첨단 위에 첨단을 얹고 개발하고 건설하고 풍요를 일구었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와 소통’에 있어서만은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는 경향을 보였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소셜네트워크 등 서로를 연결하는 회선이 천가닥 만가닥이지만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대가 바뀌고 바뀌고 바뀌어도 ‘너와 나,’ ‘그들과 나’라는 관계는 여전히 번민의 핵이었다.
왜? 라며, 부루가 물었다. 왜긴 왜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지. 부루는 스스로 답하고 또 물었다.
“만약 이 지구가 우주의 유물이 된다면 최후까지 남아 있는 건 무엇일 것 같나? 가장 진보된 과학문명과 하이테크적인 기술들? 상상력이 빚어낸 인류의 현란한 문화? 아니야.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나타낸 무늬들만 우주의 별처럼 남게 될 거야. 고도의 기술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죽기도 전에 지옥을 맛보고 마니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치고는 그럴 듯 했다. 스피커가 사방에 있는지 부루의 목소리는 이쪽에서도 나는 것 같고 저쪽에서도 나는 것 같았다. 부루가 목소리 톤을 조금 더 높였다.
“인류의 오랜 흔적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감동하는 게 무엇일까? 박물관이나 유적지에 가서 어떤 모습을 보았을 때, 찌르르 전율했는지 생각해봐. 나를 만든 인간은 오순 도순한 사람들 모습에 울컥 한다더군. 고대인들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거나, 친구지간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나, 사람들이 한데 엉겨 즐겁게 웃는 모습, 또는 포옹하는 장면이나 상대방을 향한 애절한 눈빛을 발견했을 때 눈물 나게 감동받는다고 하더군. 왜 그러는 거냐고? 바로 나, 자신의 본성 때문이지. 내 속에서도 그런 감정들이 춤을 추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지 뭐야.”
눈매 날카로운 건축주는 ‘관계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이 건물을 설계했다. 누구든 깡통건물인 부루를 바라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기를 바랐고, 건물 안에서 지친 마음과 몸이 쉴 수 있기를 염원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주술과 능력과 기술을 모두 쏟아 부었다. 그런데 그의 의도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외양은 찌질하고 성격은 소심하고 시니컬한데다 뭐든 제멋대로였다. 눈매 날카로운 건축주는 몹시 실망해서 회로를 다시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바꾸고 이리저리 손을 댔지만, 손을 대면 댈수록 관계에 대한 정보는 지워지고 지워졌다. 마치 골치 아픈 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깡통집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 같았다. 종내에는 사랑과 연애 관계에 대한 것들만 남기고 다른 것은 다 사라지고 말았다. 정말 깡통 같은 놈이었다. 그는 더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그만 그곳을 떠났다.
그래, 그는 떠나고 말았어. 라고 말 한 뒤 부루는 침묵했다. 그러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인간들은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하더군. 오, 이건 마법이야! 마법이라고! 그래, 난 문명의 부산물로 이루어진 깡통이지만 분명히 마법이야. 핑크 컬러로만 채워져 있다 해도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마법이란 말에 웃음이 터졌지만 도진은 애써 입을 다물었다. 혼자 들떠 떠드는 깡통이 애처롭기도 했고, 어쩌면 그를 위해 마법을 베풀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비가 그쳤는지 천장에서 들어오는 빛이 조금 밝아졌다. 유리천장의 오목하게 들어간 공간엔 빗물이 가득 차 있고 바람을 따라 일렁거렸다. 머리 위에 물그릇을 얹어 놓은 기분이었지만 천장을 믿는다면 이보다 멋진 풍경도 없었다.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도진이 말했다.
“마법사라서 내가 여자 친구에게 차인 걸 한 눈에 알았군. 그래서 선심 쓰듯 붙잡은 거고.”
“난 독심술을 쓰지 않아. 그 기능을 꺼버렸어. 밖에서 기웃거리는 인간들의 희미한 얼굴만 봐도 그들의 내력이 다 읽히는데 질렸거든. 나는 네 얼굴에 지옥도가 그려진 걸 보고 잡은 건데, 누군가로부터 뒷발질을 당했다고?”
마치 한 건 낚아챈 것처럼 신이 난 목소리였다. 그러나 도진은 뒷발질이란 말만으로도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차이는 건 기분 나쁘지.”
부루가 흐흐대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끝날 정도로 쌈박한 일은 아니야. 넌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 기분을 몰라. 그런 것도 모르면서 나불거리기는!”
상대방 기분도 모르고 깐죽거리는 놈들은 무조건 패줘야 한다. 도진이 씩씩거리자 부루가 얄쭉히 받아쳤다.
“아아, 열 받지 마. 그렇잖아도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괴로워서 숨쉬기는 것조차 힘들잖아. 그런 상태에서 화를 내면 호흡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툭하면 두통이고, 입맛이 없어 밥도 제대로 못 먹지? 그러다 속 다 버린다. 요즘엔 젊은이들도 위통 때문에 난리야. 그래, 점심은 먹고 올라 온 거야?”
“위해주는 척 하지 마셔”
도진은 부루의 말투를 흉내 냈다.
“게다가 요통까지 도진 모양이군. 그렇게 뒤척거리기 보다는 고양이 자세를 취해보는 건 어때? 요통에는 매우 좋은 포즈지. 어쨌든 마음의 고통은 신체 건강까지 위협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주었으면 좋겠어.
“떠벌리는 게 체질인 모양이지?”
“이렇게 물어보긴 좀 뭐하지만, 그래, 일방적으로 차인거야? 아니면 네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거야? 보아하니 아무런 언질도 없이 그저 이별통고를 받은 거 같은데, 맞아?”
“그래, 맞다. 맞아. 어쩔래?”
“진정해. 진정해. 그렇게 열을 낸다고 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건 아니잖아. 그래 뭐가 문제래?”
“우린 서로 안 맞는 댄다. 일 년 가까이 잘 지내놓고 이제 와서 안 맞는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그래, 그래, 그런데, 감정이란 날씨 같은 거야. 오늘 비가 오는 게 말이 돼? 라고 묻는 건 제대로 묻는 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비는 일 년 열두 달 내내 내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야. 비는 곧 그치고 먹구름은 어딘가로 흘러가버리지. 어쨌든 말이야, 난 사랑에 대한 우화를 많이 알고 있어. 비도 오는데 이야기 한 줄 어때? ……”
부루가 성우처럼 목소리를 깔았고, 도진은 팔을 괸 채 벽으로 붙었다.
어느 산기슭에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었다. 외딴 곳인데다 길도 나 있지 않아 아무도 찾지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조차 머물러주지 않았고, 저만치 서 있는 대추나무는 아직 어렸고, 발치 아래 이팝나무는 도통 말이 없었다.
물푸레나무가 연초록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며 심심함을 달래고 있을 때, 위쪽 산중턱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유난히 시끄럽네. 어제보다 더 좋은 일이 있는 걸까? 물푸레나무는 목을 빼고 돌아보았다. 서어나무와 갈참나무와 사스레나무가 몸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얼굴이 발개진 때죽나무를 가운데 두고.
노오란 깃털을 떨며 동박새 한 마리가 때죽나무 겨드랑이에 부리를 비비고 있었다. 때죽나무는 간지러워 얼굴을 붉혔고, 동박새는 작은 꽁지깃을 발딱 발딱거리며 때죽나무 줄기 사이로 파고들었다. 때죽나무 꽃봉오리가 종처럼 마구 울리고 있었다. 동박새는 고개를 들고 찌-이, 찌-이 애교 있는 울음소리를 냈다. 높이 지저귀는 소리를 따라 지빠귀와 곤줄박이가 날아와 나무들 위로 내려앉았다. 새와 나무들은 웃고 떠들고 간지러워 했다.
한참 동안이나 그들을 바라보던 물푸레나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푸레나무도 늠름한 가지에 새들을 앉혀놓고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물푸레나무는 가지를 흔들며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불렀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른 나무에게로 가거나 더 멀리로 날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날개깃이 아름답고 꽁지가 긴 어치 한 마리가 날아왔다. 깜짝 놀란 물푸레나무의 눈은 어치의 날개 짓만 좆았다. 어치는 예쁜 날개깃을 흔들며 이리저리 날아 한 가지에 앉았다. 나무는 숨을 죽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설령 잘못 날아온 어치라 해도, 그래서 곧 떠난다 해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잠깐 동안이라도 어치가 제 집처럼 편안해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았다.
“내가 무서워? 겁먹었어?”
어치가 꽁지깃으로 나무줄기를 건드리며 놀렸다.
“아, 아니야. 움직이면 네가 달 아 날 까 봐……”
물푸레나무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갔는데, 어치가 혹시라도 마음 상해 날아가 버릴까봐 조마조마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나 졸린데 조금 자도 되겠네. 네 팔이 든든해 보여서.”
“당연하지. 햇빛도 바람도 너를 못 건드리도록 내가 지켜줄게. 얼른 자. 마음껏 자도록 해.”
“넌 굉장히 친절하구나. 골짜기를 건너왔더니, 아, 피곤해.”
어치는 쭈삣쭈삣 깃을 펴 스트레칭을 하고는 물푸레나무의 커다란 줄기에 기댔다. 어치의 숨결이 물푸레나무 잎에 닿았고, 찌르르 전기가 일었다. 어치의 솜털이 물푸레나무 가지를 스칠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거렸다. 가슴 속에서 밥티 같은 꽃송이가 터지고 머릿속까지 화안해지는 이 기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물푸레나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날 이후로 물푸레나무와 어치는 친구가 되었다. 물푸레나무의 입은 귀를 지나 머리에 걸렸다. 어치가 꽁지깃으로 나무의 겨드랑이를 건드릴 때마다 웃음을 터트렸다. 물푸레나무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온 산을 울리고 저 너머까지 닿았다. 물푸레나무는 행복에 겨워 어떻게 날이 가고 달이 지나는지 까맣게 잊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물푸레나무는 그 어느 때보다 밝디 밝게 단풍이 들었다.
“아, 심심해. 이곳은 다 똑같아.”
물푸레나무 가지에 앉아 한 잠 자고 일어난 어치가 대뜸 투정을 부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를 들으며 물푸레나무는 단풍이 오고 있는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곳으로 놀러 나갔다 오지 그래. 빨갛게 물든 층층나무도 구경하고 산열매도 따 먹고. 올해는 단풍이 정말 아름다워.”
“그래야겠어. 오늘은 바람 좀 쐬고 와야지. 그런데 너 혼자 있음 심심하지 않아?”
“전혀. 난 여기 서서 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거든. 내 걱정하지 말고 얼른 다녀와.”
물푸레나무는 흔쾌히 장단을 맞추며 어치의 등에 떨어진 낙엽을 떼 주었다. 물푸레나무의 얼굴을 잠깐 바라본 어치는 뾰족한 부리를 나무줄기에 대고 비볐다.
“그러고 보니 세상 구경한 지 정말 오래된 것 같아. 나 좀 늦어도 되지?”
“당연하지. 마음껏 돌아보고 와. 난 언제나 이 자리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게.
물푸레나무의 말에 어치는 생긋 웃고는 후루룩 날아올랐다. 날개를 활짝 펼쳐 공기를 가르며 산중턱을 지나 산등성이 너머로 날아갔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물푸레나무는 지난 기억을 한 잎 한 잎 넘기며 기쁨에 젖었다. 어치는 재치 있고 깜찍했다. 날마다 보는 똑같은 풍경도 어치의 입에서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뀌었다. 어치의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을 떠올린 물푸레나무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어치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따라 동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지만 어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과 불안에 싸인 물푸레나무는 바람을 불러 어치의 소식을 묻고, 구름에게 어치의 행방을 물었다. 바람은 어치가 날아간 쪽을 가리키며 산 너머 새 숲은 사철 푸르다는 말만 하곤 휙 날아가 버렸다.
수많은 이파리처럼 수많은 생각이 물푸레나무의 가슴속을 헤맸다. 돌려 생각하면 외딴 산자락은 어치가 눌러 살 곳이 아니었다. 또한 어치는 물푸레나무에게 사랑한다는 고백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물푸레나무가 가여워서 이제껏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찾아 떠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날 안 좋아했던 것일까?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날마다 생각이 물푸레나무를 갉아댔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외롭고 서글퍼서 견딜 수 없었다.
사랑은 움직일 수 없어서 괴로운 것이었다. 자유롭게 바꿀 수 없어서 아픈 것이었다. 물푸레나무는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면서도, 새로운 일에 몰두해야겠다고 결심을 하면서도 여전히 어치를 기다렸다. 외딴 산기슭에 눈이 내리고 쩡쩡 갈라지는 추위 속에서도 물푸레나무는 여전히 목을 빼고 있었다.
겨울 적막이 산을 에워싸고 숨소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가득 채웠던 나무들과 바람과 구름과 풀들의 수런거림도 사라져 가고, 날개깃이 아름답고 꽁지가 길던 어치만이 남았다. 때때로 차갑다가 곧 다시 다정하게 굴던 어치의 흔적을 되새기며 물푸레나무는 메말라 갔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의 기척들이 사방을 들뜨게 했지만 물푸레나무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뿌리는 말라 물을 길어 올리지 못하고 새 움은 눈을 뜨지 못하고 쪼그라들고 있는데도 오로지 어치와의 기억에만 파묻혀있었고 점점 자신조차 잊어 갔다.
“그래,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만큼 사랑은 답이 없는 거야. 사랑이 몸을 돌려도 내 시선은 여전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의 통로에 갇히는 거고.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좁고 어두운 통로에서 눈물과 콧물로 강을 만들고, 소주잔으로 탑을 쌓지만 해결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몸만 상하고 사고방식만 뒤틀릴 뿐이지. 그럴 땐 움직여야 해.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여야 해.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장단을 맞추고, 재미있는 유머를 찾아봐야 해. 새로운 이야기를 읽으며 매여 있던 생각을 흔들어주어야 해.”
부루의 말에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화는 찢어진 마음을 한 바늘도 꿰매주지 못한다. 이야기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면 주구장창 구연동화라도 틀어놨겠지. 그렇다고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우울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달콤한 데이트란 이런 것이라고 보고서를 쓰고 싶을 정도로 커플의 기쁨을 이어갔다. 날씬한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도진의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도진의 짓궂은 농담을 잘 받아쳤다.
그런데 한 번 다투었다 하면 그녀는 입을 꾹 닫았다. 며칠이고 간에 말을 안 하는 통에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무엇이 불만인지 속 시원히 말해주지도 않았고, 속수무책으로 발을 구르는 동안 물도 새지 않을 만큼 친밀했던 관계는 마른 송판처럼 뒤틀려 사이가 떴다.
그런 일이 거듭되더니 기어이 갈라져 버린 것이었다. 일주일 만에 전화를 한 그녀는 지루할 만큼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많이 생각했어. 우리 이제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 라고. 그녀의 말이 망치처럼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왜? 라고 물었다. 그녀는 가만히 숨을 내쉬고는 서로 맞지 않는 것 같다. 라며 많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뭐? 맞지 않는 게 뭐야! 그는 다그치듯 물었다. 뭐가 안 맞는다는 것인지 말해봐, 맞지 않는 게 있으면 바꾸고 고치면서 맞추어 가면 될 거 아니냐고 거듭 붙잡았지만 그녀는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휘발되어 사라진 공간이 그를 삼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모래구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빠져드는 늪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늪은 깊어졌고, 그녀와의 결별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게 사랑의 모래무덤이야. 봉분도 없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쓸쓸한 고통의 구덩이지. 모래알 씹히는 곳에서 혼자 몸부림치는 거 생각보다 힘든 거다.”
뭐라고? 부루의 약 주고 병 주는 장난에 도진의 심사가 꼬였다.
“마법이라면서? 이제 보니 마법이 아니라 떠벌이 약장수였어?”
“누가 약장수야?”
“되묻는 건 약장수의 특허지. 아마?”
도진이 차갑게 내뱉었다.
“마법이 필요해? 그녀와의 기억을 지워줄까? 아니면 새 여자 친구를 위해 얼굴을 빤질빤질하게 깎아줄까? 오호, 그녀가 다시 너를 좋아하게 만들어주는 게 좋겠군, 그러려면 네가 그녀의 마음에 쏙 들면 되는데, 그래, 그녀가 좋아하는 연예인 있지? 누군지 말해봐. 똑같이 만들어줄게. 지금 바로 너 자신을 싹 지우고 제 2의 그가 되는 거야. 어때?”
부루의 빈정거림에 도진의 가슴 복판에서 불이 일었다.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럼, 맘대로 살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 좋아죽을 때마다 뻥뻥 차이면서 말이야.”
“지금 악담을 하는 거야 뭐야!”
화가 머리끝까지 벋친 도진은 방방 뛰었지만 부루를 어쩌지 못했다. 얼굴이 안보이니까 형체 없는 적처럼 애매하기 짝이 없었고, 애매하니까 더 분통이 터졌다. 애꿎은 벽을 쾅, 쾅, 차던 도진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하필 철판이 도드라져 있던 곳을 찼는데, 눈알이 튀어나오고 별이 날뛰었다. 빨개진 발가락들은 금세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크으, 아팠겠다.”
부루의 뭣 같은 위로에 도진은 대꾸 한 마디 못하고 발을 잡고는 쩔쩔맸다. 입이 딱딱 벌어질 만큼 지독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부루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는지 도진에게 창문 아래 소파에 앉으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도진이 한 발로 뛰어 겨우 소파에 앉자 소파는 위 아래로 길게 펴지고 올라가 반듯한 침대가 되었다.
“자고로 연애란 말이지……”
부루가 일장 연설의 서문을 뗐다.
“연애고 뭐고 발부터 어떻게 해달란 말이야!”
도진이 벌컥 화를 내며 발을 쳐들었다. 바윗돌을 매단 것처럼 발이 무거워 제대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아, 씨X……”
도진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지만, 부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네 마음의 고통이 발로 몰리고 있는 거라고. 다치고 약해진 곳으로 스트레스가 흘러넘쳐 계속 부어오르는 거니까 마음부터 안정을 취하도록 해. 자, 크게 크게 숨을 내쉬어. 그런 다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것을 생각해.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를 떠올리라고. 아참, 너한테는 깨진 연애가 발등의 불이지? 답이 없네. 답이 없어. 연애는 그저 마냥 좋고, 실연은 그저 마냥 괴로우니 어쩌겠어. 그냥 몸부림치며 괴로워해야지. 그렇지?”
“그래, 넌 그냥 개깡통이야.”
도진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아직도 이해를 못 했나 본데. 네가 짜증을 부릴수록 스트레스 호르몬이 콸콸 흘러나와 다쳐 약해진 쪽으로 신나게 달려간다고. 조금 있으면 네 발이 축구공을 넘어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오른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어. 어쨌든,”
부루는 본격적인 잔소리 모드로 돌입했다.
“사랑하는 그녀는 너의 모든 것이었어. 그녀를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었어. 그런데, 그녀는 너를 차버렸어. 서로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말이야. 오호, 알고 보니 사랑은 축구공이었던 거야.”
뭐야? 이 상황에 농담하는 거야? 이건 진짜 제대로 미친 깡통이었다. 도진은 이를 악물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아무 죄도 없는 천장은 해사한 표정으로 오후의 짧은 빛을 수면 위에 드리운 채 도진을 마주보고 있었다.
“흐흐흐, 농담에도 웃지 않는 걸 보니 단단히 화가 났군. 그래, 그래, 네가 정성을 다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 이거야.”
그랬으니까 차였겠지!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건 또 다른 고통이었다.
"네가 쇼맨이냐? 마음을 얻으려고 안달을 하게. 그렇게 안달복달 해서 얻은 마음은 수가 틀리면 돌아서기 쉽다는 거 몰라?
사랑은 마음을 얻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마음이 딱 붙는 거야. 뜨거워진 두 사람의 마음이 딱 붙어 도톰하고 푸근한 하트를 이루는 거지. 상대방이 아프면 나는 더 아프고, 상대방이 기쁘면 내가 더 기뻐하는 하트의 작용이 시작되는 거고. 그게 바로 온 사랑이야. 온 사랑을 줄여서 그냥 사랑, 커플, 짝, 내 여친, 내 남친, 자기야, 등등으로 부르는 거고.
한쪽만 열을 내는 건 당연히 짝사랑인데, 커플이라 광고 하는 사이이지만 광학 현미경을 들이대고 보면 짝사랑인 거 많다는 거 알지?
두 마음이 딱 붙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야. 아주 드물게 순간에 두 마음이 딱 붙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천천히 진행되는 거야. 안 그런 척 게걸음으로 다가가고, 고양이 걸음으로 마주 다가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살며시 마음을 내밀어 끝부터 맞춰보는 거야. 한쪽이 덜 달구어지면 안 붙는 건 당연하지. 시간이 지나도 안 달구어 질 수 있는 거야. 겉으로는 달구어진 것 같은데, 속은 냉랭할 수도 있고. 가장자리는 맞았는데, 그 위에 헛바람이 들어 거기부터 안 붙을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은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른지만 금방 붙을 수도 있어. 가운데가 딱 붙으면 나머지는 남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중심이 딱 붙었으니까 적어도 뒤틀릴 걱정은 없잖아. 그렇게 두 마음을 딱 붙이는 게 사랑이야.
그녀가 꽤 똑똑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너와 그녀의 마음이 안 맞는다는 걸, 그래서 딱 달라붙지 못한다는 걸 너보다 빨리 알아챘잖아. 계속 더 나가는 건 서로를 기만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 너도 그녀와 안 맞는 건 아닌지 무의식 중에 고민해봤을 걸.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와 밀착될 때 느꼈던 그 따스함 때문에, 그러니까 그 놈의 정 때문에 그냥 덮어두고 간 거야. 안 그래?”
퍽도 그러겠다. 라고 말 할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도진은 코뿔소처럼 푸우, 푸우, 콧숨만 내쉬었다.
“자주 만나고, 마주 보며 밥 먹고, 손잡고 영화보고, 잘 조성된 산책로를 걷고, 때를 따라 이벤트를 열어주면 연애가 완성되는 거라고 네가 믿었을 때, 그녀는 그런 건 연애의 활력 정도라고 여겼을지도 모르지. 연애의 십전대보탕 같은 거 말이야.
물론 사람은 모두 달라. 여자와 남자는 아예 자전하는 방향이 다르지. 그러니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그 때문에 이해 불가 판정을 내리고 다투고 싸우고 엇갈리기도 하지만, 달라서 서로에게 이끌린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면 좋겠어. 다르기 때문에 호감이 생기고, 호감의 색깔이 점점 변하고 고조되는 거지.
고조된 감정이 뜨겁게 변하는데 감동이 가장 크게 기여한다는 건 알고 있지? 아아, 감동이란 말에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작은 풀꽃만 봐도 어어? 어머? 라고 감동의 감탄사를 터트리잖아. 앙징맞은 강아지한테서도 감동의 물결을 경험하지, 한 점 슛에도 환호하며 감동하고, 오늘 멋진데, 좋은 일 있어? 라는 한 마디에도 박하사탕을 깨문 것처럼 기분이 화안해지잖아. 사람은 감동의 파노라마 속에서 사는 존재라고. 그것이 행복한 기분에 휩싸이게 하고 에너지를 끌어 올려주니까.
사랑의 접착제인 감동은 연출의 결과물이 아니야. 마음에서 우러나온 어떤 행동에 대한 반응이야. 그러니 감동의 기술을 배우려고 애쓰지 마. 그보다는 그녀를 위한 배려에 마음을 기울여야지. 예를 들어볼게.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타코야끼 노점을 지나가게 되었어. 그녀가 아주 좋아하는 간식이라는 생각에 얼른 샀어. 바람은 쌀쌀하고, 식으면 맛이 없고, 그래서 품안에 넣었어. 스타일 구기는 건 물론이고, 누가 놀릴까봐 눈치도 보였어. 그래도 그녀를 위해 뛰었어. 참 따듯한 배려이고 정성이지 않아? 또 한 가지 예, 그녀를 만난 이후부터 틈틈이 그림일기를 쓰는 거야. 서툴지만 애교스런 그림과 짧은 글에 네 마음을 담는 거지. 그녀와의 데이트, 그녀에 대한 생각, 그녀의 고민에 대한 안타까움 등을 진솔하게 담는 거야. 둘 사이가 삐걱거릴 때, 한 장 한 장 그려놓고 적어놓은 마음을 건네주고 돌아서는 거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진심을 그보다 어떻게 더 표현할 수 있겠어? 그런 정성과 배려가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두 마음의 접착력 또한 훨씬 단단해지는 거지. 그런데 상대방이 그런 시시한 거 말고 좀 더 화끈한 것을 원한다면? 아, 그건 나도 몰라. 그런 건 둘이서 해결해.
“해결할 수 없으면?”
“그걸 질문이라고 해? 서로 안 맞는 거지. 그냥 한쪽이 짝사랑에 몸 달은 거뿐이야. 그런 건 짝사랑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아, 눈살 찌푸리지 마. 그런 과정 없이 어떻게 연애를 하냐? 그것도 사랑이고 연애야. 사랑에 대한 수업일 뿐 아니라 인생 공부야. 세상과 사랑이 얼마나 험난한지 일찍부터 깨우치고 배우는 거라고. 그러니까 요점은 그녀한테 채였다고 난리법석만 떨지 말고 고마워 해. 안 맞는 거 제대로 알려줬잖아. 안 그래?”
안 그래. 란 말이 어찌나 똑부러지는지 발등의 통증이 극에 달했는데도 불구하고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실토한다는 듯 부루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말이야. 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 그 기분 진짜 느껴보고 싶은데 말이지. 이 좀 꽉 물어봐.”
부루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벽이 열리고 스테인레스 기구가 나왔다. 긴 자루의 둥근 끝에 빼곡히 박혀 있던 침이 도진의 발등을 찍어 눌렀다. 발등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오르자 한 자루의 기구가 잽싸게 발등을 감쌌다. 탄력 좋은 빨판이 피를 빨아들이자마자 붓기가 가라앉으며 통증이 가셨다.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끌려진 기분이었다. 도진이 도전적인 말투로 물었다.
“일부러 나한테 충격요법 썼지?”
“네가 충격을 불러 왔잖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일부러 망아지처럼 날뛰었던 거 아냐? 그러니 내가 안 도와줄 수 있어.”
“병 주고 약주고, 아주 돌팔이 같으니라고.”
“뭐야? 축구공만한 발을 원래대로 돌려놨더니 돌팔이래. 그래, 돌팔이가 한번 물어봐야겠다.
“너 처음이지?”
풋, 입 안에 고인 침을 뿜을 뻔한 도진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깊이 빠진 게 처음이라서 이 발광을 하는 건 아니다. 그녀를 그만큼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결별은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로 세다.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모르는 고통이다.
“그래, 괴로우면 괴로워하고. 울고, 소리를 질러. 그녀 사진을 붙잡고 미친놈처럼 횡설수설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세수도 하지 말고 이도 닦지 말고 샤워도 하지 말고 끝도 없이 괴로워 해. 가렵고 끈적거리고 텁텁해서 미쳐버릴 때까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욕실로 달려가. 달려가서 세찬 물줄기에 온 몸을 맡기는 거야. 비누 거품을 잔뜩 내 세수를 하고 잇몸이 찢어지도록 이빨을 닦으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득뽀득 씻고 나오면 솜털까지 시원해서 어쩔 줄 모를 걸. 삭아가던 마음도 새 것으로 교체한 것 같고.
그럼, 그대로 컴퓨터 앞에 털썩 주저앉지 마.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그 기분이 뒷골목으로 달아나기 전에 빨리 산으로 가라고. 사람은 쳐다보지도 말고 눈도 맞추지 말아. 그냥 사물과 자연물만 보고 걸어. 너도 자연체의 일부라는 걸 상기하면서 말이야. 오솔길에 핀 눈곱처럼 작은 풀꽃을 바라보고, 멀대처럼 키 큰 나무도 올려다봐. 하늘에 뜬 주머니구름도 보고, 새록새록한 잎사귀를 피워 올리는 나무와 풀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거야.
늦은 밤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작은 눈을 빛내고 있는 별들, 너와 눈 한번 마주치기 위해 칠흑의 어둠을 뚫고 온 그들을 친구처럼 불러보는 거야. 이 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새롭게 확인 하며 뭔가 다른 에너지로 너를 채워보는 거지. 그런 뒤, 충분히 그런 뒤에 또 다시 사랑을 찾아 달려야지. 아무 두려움 없이 말이야.”
진짜 말 많은 깡통, 누가 말리겠어.란 말이 도진의 목구멍을 넘어갔다. 도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천창으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어렸다가 웃으며 사라져 갔다.
해가 기울고 있는 지, 천장 유리로 빛이 비스듬히 비쳐들고, 비쳐든 빛들이 벽면에 부딪쳐 일렁였다. 연정처럼 붉었고 시시각각 온갖 무늬를 그려내던 사랑의 설렘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