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lief Apr 11. 2021

사랑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할지라도

세번째 이야기- 말(語 )이 뛰어 놀 때

 숫기가 없다고 흥이 없는 건 아니다. 수줍음 때문에 말도 못하고 움츠러든다고 해서 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짓까불며 앞뒤로 흔들어대는 은사시나무처럼 누구나 장난기가 있고 농담이 있다. 배꼽 쥐는 웃음이 있고 신명이 있고, 내밀한 곳에서는 용암처럼 뜨거운 연정이 뽀괄뽀괄 끓고 있다.

 바로 이 청년들이 그럴 거라고 부루는 생각했다. 훌쩍한 키에 후드티를 입은 청년과 코뿔소와 맞장 뜨게 맷집이 좋은 남방셔츠 청년이 두 시간 전부터 올라와 럭비공을 던지고 받더니 깡통집의 옆구리까지 강타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 그도 싫증이 났는지 유리문에 얼굴을 밀어 으스러지게 눌러대다, 씹은 껌을 발가락 버튼에 붙였다가 찍찍 늘어 빼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소리가 난다 싶으면 잽싸게 몸을 움츠리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겁을 집어 먹은 방어가 아니라 부끄러움, 곤란함, 어색함 등 난처한 상황을 지레 짐작하곤 자라들처럼 셔츠 속으로 머리를 구겨 넣는 것이었다. 치기와 방만이 망아지처럼 날뛰는 이십 대 초반의 청년들이 구멍 속의 두꺼비들처럼 뽀그작뽀그작 거리다니, 물론 알고 있었다. 못 말리는 수줍음이나 심하게 부끄러움을 타는 건 성향이기 때문에 조언이나 잔소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렇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울화가 치밀고 속이 터졌다.   

 부루의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청년들은 새끼발가락의 껌을 떼서 유리문에 붙였다. 양쪽으로 잡아 당겨 늘여 뺄 수 있을 만큼 늘여 뺐다. 먼지 한 점 없던 유리문에 시커먼 껌이 누더기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더러워진 껌이 강화유리를 녹여버린 것처럼 유리문이 물렁해지더니 폭삭 주저앉아버렸고, 누가 끌어당긴 것처럼 청년들은 깡통집 안으로 나동그라졌다.

 허겁지겁 일어난 후드티가 남방셔츠를 일으켜 밖으로 돌진했다 튕겨져 나왔다. 어느 사이 유리문은 제 모습으로 돌아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뭐, 뭐야? 우리 갇힌 거야?”

 후드티가 황망히 말을 더듬는 남방셔츠를 붙잡고 민첩하게 일어났다. 깡통집이 마술을 부린다더니 사실이었다! 그들은 등지고 서서 마법사와의 대결 자세를 취했다.   

 “한번 해보려고?”

 난데없는 목소리에 청년들의 눈은 휘둥그레지다 못해 사발만 해졌다.  

 “누구야! 모습을 보여!”

 남방셔츠가 두터운 가슴을 앞으로 밀며 외쳤다. 있는 힘껏 성대를 진동하여 힘차게 밀어냈건만 말이 떨리는 건 어쩌지 못했다. 게다가 벽을 스치고 지나가던 맵찬 눈초리 때문에 턱까지 덜덜 떨렸다.

 “걱정 마 안 잡아먹을 거니까. 내 집에 온 손님인데, 왜 겁을 주겠어.”

 “그렇게 숨어 있지만 말고 모습을 드러내요!”

 후드티도 바닥의 용기까지 쥐어짜 외쳤다.   

 “깡통이 내 모습이라니까. 왜 그렇게들 못 믿는 거야. 어쨌든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놀다 가. 뭐, 거기 스크린을 끌어내려 들어가서 놀아도 좋고.”

 부루가 친절하게 일러주었지만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여전히 경계태세를 풀지 않았다.   

 “그럼, 난 좀 잘 테니까 편하게 쉬도록 해.”

 부루는 진짜 졸립다는 듯이 하품까지 하며 말했다. 쉴 필요도 없었고, 늘어져 쉬지도 않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손님들이 안절부절 못할 것이다. 사실 심심하지만 그렇다고 이 숫기 없고 낯가림 심한 청년들과 수다를 떨 순 없었다. 부루가 한 마디 할 때마다 혀가 굳고 근육이 뻣뻣이 긴장하다 주저앉고 말테니까. 거기다 부루의 주무기인 연애와 사랑을 떠벌리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연애 하고 싶어 죽겠지만) 여자한테 말 거는 거조차 겁을 내는 쑥맥들이잖는가.       

 부루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연애와 사랑은 말로 시작하고 말로 분위기를 잡고 말로써 상승 기류를 탄다. 그런데 입을 딱 봉하고 있으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분위기를 잡느냔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두 청년의 어깨부터 잡아 올려 각을 세우고 얼굴을 들어 상대를 바라보는 연습부터 시키고 싶었다. 낯간지럽지만 달달한 언어들을 입 속에 넣어 주고 연인의 귀 에 속삭이는 방법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나이가 몇 개 인데 그런 것도 할 줄 모르냐며 뒤통수도 후려쳐 가며 말이다. 그러나 부루는 나도 모르겠다. 라며 입을 꾹 닫아버렸다.     

 깡통집에 적막이 가득 차올랐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바늘구멍 난 럭비공에서 바람 새듯 간간이 흘러나왔다. 마법사인지 뭔지는 어디로 가 버린 모양이었다. 청년들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약 9평방미터의 실내는 완벽한 둘 만의 공간이었다. 

 “사라졌나봐.”

 남방셔츠가 소곤거렸다.

 “마법사라잖아. 사라진 척 했을 거야.”

 후드티가 여전히 긴장 어린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남방셔츠는 어깨가 무거워 더 이상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싶지 않았다. 팔을 움직여 굳은 근육을 풀며 남방셔츠가 말했다.   

 “그래도 해꼬지를 하는 위인은 아닌가봐. 목소리에 진정성이 있더라고.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는 거 같은데 좀 놀다 가지 뭐.”

 벽 쪽에 소파 한 개, 중앙의 반쯤 내려온 스크린 한 점이 가구의 전부였다. 들여다 볼만한 것도 없고 만져 볼만한 것도 없었다. 흥, 컴퓨터조차 없잖아. 순날강도. 남방셔츠는 구시렁거리며 스크린 앞에 섰다. 가장자리의 끈을 잡아당기자 순백의 울트라 비드 스크린이 주루룩 내려왔다. 얼마나 긴지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뭐야, 왜 이렇게 길어. 이거 창문 가리개잖아.”

 후드티가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경계와 호기심이 뒤죽박죽인 표정이었다.    

 “아까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하지 않았어?”

 스크린을 만지던 남방셔츠는 묘한 느낌에 위로 손을 벋었다. 뭔가 튕기듯 사라지는 이상한 기분에 스크린 전반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탄력 있는 뭔가가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 같았다. 남방셔츠가 헤벌어진 입으로 말했다.  

 “이거 있잖아. 느낌이 이상해. 여자의 다리를 터치한 것 같아.”

 “놀고 있네. 여자한테 닿아보기나 하고 그런 거짓말을 해라.”

 후드티가 핀잔을 주었지만, 꼬리뼈 안쪽이 뿔끈거렸다. 남방셔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팔팔한 청춘의 감정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마음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빠시락 소리를 내며 감정의 포장을 벗겨낼 때, 어떤 기분일지, 으으으, 남방셔츠가 몸까지 떨자 후드티가 확 밀어버렸다.

 “아주 지랄을 해라. 응? 아예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영화를 찍지 그러냐? 적나라한 19금으로.”

 “상대가 없잖아. 상대가. 그나저나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놀라던 말은 빈 말이었어? 마법은 무슨.”

 남방셔츠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폴대에 달린 양복 단추만한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버튼 위에 깨알처럼 박힌 큐빅들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버튼이 아니라 장식 단추인 모양이다. 라고 말한 후드티는 스크린 안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보았고, 남방셔츠를 확 잡는 순간, 두 사람은 스크린 안으로 빨려 들어가버렸다.     


 


 후드티와 남방셔츠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모래밭을 뛰었다. 헛 둘, 헛 둘, 구령에 맞춰 일정한 보폭으로 백사장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한 시립대의 럭비 선수들이었다. 여름 방학이었고 팀원들과 함께 서해의 한 해수욕장으로 전지훈련을 간 것이다.  

 임시거처인 숙소는 팔팔 끓는 증기솥이었고, 맨발로 뛰는 모래밭은 무거운 구덩이, 젊고 왕성한 발목을 악머구리 떼처럼 끌어당겼다. 머리 위에선 태워 죽일 작정으로 폭염이 쏟아지고 알사탕 같은 땀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쏟아져 메마른 모래알을 적셨다. 

 바다는 포말을 일으키며 몰려왔다. 먼 수평선으로부터 밀려 온 흰 조랑물들, 바그르르한 거품은 바다의 말이자 수중 생물들의 조잘거림을 바람이 한데 섞어 일으킨 것이었다. 그 거칠고 다정한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것은 잘 빚어진 하루를 기대하게 했다. 빛이 기지개를 켜기 전에 모래밭으로 뛰었다. 밤사이 지열이 잦아들고 해풍이 어루만져 놓은 모래밭은 물기어린 조막손이 간질이는 것처럼 산뜻하고 보드라웠다. 큼직한 발자국들이 찍히다 뭉개지고 움푹 파이고 튕겨나갔다. 두 진영으로 나눠 서로의 실력을 가늠해보는 건 언제나 근육을 긴장시켰다. 알 수 없는 근성이 손가락 끝까지 벋쳤다. 닿으면 심장을 뛰게 하고, 하루 종일 부비고 싶은 럭비공은, 그러나 결코 품을 수 없는 그 무엇처럼 공중을 날고 손아귀를 빠져나가 모래밭 위를 굴렀다. 이내 햇살이 길게 팔을 벋으며 사방을 달구었다. 몸이 땀에 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찐득한 더위와 함께 진종일 뒹굴었다.

 행락객이 적은 바닷가의 밤은 둥지처럼 깊었다. 밤은 적막했고 밤바람과 드문드문한 인적이 피운 불빛들이 파도소리에 섞여 아름다운 환영을 이루었다. 그대로 숙소에서 몸을 뉘는 것은 무엇인가를 배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드티와 남방셔츠는 숙소를 나와 걸었다. 여느 때와 다르게 천천히 걷자 다급하고도 절실하게 말려있던 의식이 스르르 펴지는 것 같았다. 등뼈를 곧추세워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둠에 가려진 사위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침잠에 들고, 하루는 경건을 도모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모래밭이 끝나고 소나무 숲으로 가는 풀밭에 텐트 몇 채가 세워져 있었다. 땅바닥에 추녀를 잇대고 있는 텐트 집은 소박하고도 애틋했다. 흐릿하게 동그라미를 그리는 렌턴 불빛이 새어나오는 어느 집에선가 가늘고 높게, 까르륵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청년의 귀가 솔깃해졌다. 똑똑 두드리고, 잠깐 들어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둘이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앞을 서성거렸다. 텐트 벽으로 여리 여리한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여자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또래였다. 머리칼을 넘겨 귀 뒤에 꽂은 여자는 문 앞에 설치한 버너에 불을 붙이고 코펠을 얹었다. 쉬이익…소리와 함께 푸른빛을 뿜으며 불꽃이 코펠 너머로 널름거렸다. 멈칫거리다 다가간 두 사람은 온갖 감언을 늘어놓으며 커피 한 잔을 부탁했고, 여자를 따라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회담을 하는 양 두 여자와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커피가 향내가 풍겨 올랐다. 낯선 밤을 치하하는 향기였다. 손님들은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뜨거운 몇 모금 커피를 마시자 땀이 배어나오고 얇은 트레이닝복이 살갗에 달라붙었다. 후드티가 입을 열었다. 

 “커피가 이렇게 단맛이 나는 줄 몰랐어요. 아주 맛있어요.”

 후드티의 치하에 여자들이 웃었다. 웃음은 어색하고 딱딱하던 공기를 톡톡 건드려 부드럽고 말랑하게 만들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이요.” 

 생머리 여자가 대답하곤 어디에 텐트를 쳤냐고 물었다.

 “저희는 숙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트레이닝 중이에요.”

 천천히 수문을 열면 앞 다퉈 물이 쏟아져 나오듯, 한번 말문이 터지자 네 사람은 또래의 동질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직장에 다니세요? 두 분만 오셨어요? 여긴 유명한 해수욕장은 아닌데,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오늘이 며칠 째인지? 모래밭 폭죽놀이는 해봤나? 라며 차츰 말(言)의 고삐가 풀렸다. 여기는 아직 오염이 되지 않아 물이 맑고 깨끗하다. 해수욕으로는 적당한 곳이다. 휴가지에서의 썸씽은 삶의 아름다운 조가비 같은 것이다. 계속 엮어지든 엮어지지 않든 영원히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썸씽이 있었느냐 등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도 서슴없이 했다. 익명성은 대담성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푸른 피의 청춘은 무엇이든 들춰보고 싶어 안달이 난 시기가 아니던가? 대화 속도가 빨라지고 농도가 진해질수록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은근한 속성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련한 그녀들. 그녀들은 모두 안개 너머에 있었고 보일 듯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으면서 얼핏 얼핏 보였다. 날이 흐리고 비가 내려도,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쨍쨍 비쳐도 그녀들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때문에 갈증은 끝이 없었다. 그렇지만 과감히 안개를 휘저어 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밤 그녀들은 안개 너머에서 얼굴을 드러냈고, 궁금증을 박박 긁어도 된다고 은연 중 부추 키고 있다. 이 싱싱한 바다의 밤에.

 바닷바람이 텐트자락을 흔들었다. 그들과 그녀들의 등을 떼밀며 재촉하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수줍은 듯 명랑하고 솔직했다. 식수대에 갔다가 꼬드기는 남자들을 달고 오기도 했다고 그들의 인상착의까지 소상히 말해 주었다. 한번 놀아볼까, 하다 짝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며 입맛도 다셨다. 그 동안 연애를 몇 번 했지만 제대로 불이 붙기도 전에 피시식 꺼져버리는 통에 아쉽고, 그러다 보니 연애에 대한 상상만 비정상적으로 부풀려 있다는 농담 같은 진담도 입 밖으로 냈다.  

 연애에 대한 비정상적인 상상이란 어떤 것일까? 후드티는 그녀가 튕겨낸 상상의 구름을 타고 텐트 안을 떠돌았다. 상상의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아랫도리가 불끈거렸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셨으나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남방셔츠도 마찬가지인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보며 주의를 주었다. 실상은 제 자신에게 가하는 압력이지만. 

 후드티는 망설이다, 냅다 물었다. 여자들도 남자들에 대해 상상을 하냐고. 두 여자는 고개를 돌려 마주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들을 힐끗 일별 한 뒤 까르르 웃었다. 

 물론 책, 영화, 인터넷 등에서는 별의별 노골적인 말들이 흘러넘친다. 그러나 그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고, 이런 말은 현장감이 있어야만 실감이 난다는 남방셔츠의 말에 여자들은 그 말의 속내가 무엇이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속내는 없었다. 말 그대로 그러는지 궁금할 뿐이라고 다시 물었다. 그래도 여자들은 주저했다.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들, 끼리끼리는 풀잎도 풀뿌리도 나무껍질도 나뭇잎도 와작와작 먹어치우는 거 같더니만, 남자하고는 쉬이 말을 부딪치려 하지 않았다. 뱀의 입처럼 교활하게, 앵무새처럼 시끄럽게 맞부딪쳐야 비로소 살 냄새 너머 그 안을 알 수 있을 텐데, 말할 듯 말 듯 속만 태웠다. 아무튼 한번 입을 열었으니 지르고 나가야 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여자도(남자,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전제지만) 여러 가지 상상을 하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와 안고 입맞춤을 하고 더 깊게는……”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한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쿡, 웃고 한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어린 자작나무처럼 희고 가느다란 목을 울리며 침을 삼킨 뒤 여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런 상상을 하냐고요? 아, 아니요.”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라 벙벙해 했다가 모두 알아차린 순간, 폭소가 터졌다.  

 은밀한 것이 고개를 들고 활보하게 되면 별 것도 아니게 된다. 비단 천에 싸여 결코 얼굴을 내밀지 않던 것을 벗기고 자꾸 보다보면 결국 보편성의 한 무리에 끼어들게 된다. 간지럼 많은 스무 살 언저리의 성(性)도 마찬가지였다. 늘 입 안에 들어 머뭇대기만 하던 것이 비로소 밖으로 나왔는데, 은어나 속어가 섞이지 않은 성은 생각보다 담백했다. 둥그렇게 부풀린 파머머리 여자가 물었다. 

 “페니스엔 뼈가 없다는데 정말 그래요?”

 “어 어 그으래요.”

 “진짜 그래요? 뼈도 없이 어떻게 단단해질까, 참 이상하네요?”

 “그건 혈, 그러니까 피가 혈관에 뺑뺑하게 차서 단단해지는 거예요. 그런데요 뼈가 있다면 아주 곤란하죠. 어디에 부딪치거나 하면 부러지기 쉽고 굉장히 아플 거고…….”

 “그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흥분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잖아.” 라고 남방셔츠가 말했을 땐 모두 허리를 잡고 말았다.  

  그날 밤 말과 말들이 비벼지고 모락모락 연기가 나고 아름답고 따뜻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뜨겁게 달궈진 말들이 튀어나와 좁은 목울대를 울렸다. 팔딱이는 숭어보다 더 싱싱한 성(性)이 말(言)을 빌려 뛰놀았다. 이제 막 어른 티를 내는 양음(陽陰)의 동물이 비로소 햇빛을 만난 듯, 청춘의 물음표들을 가감 없이 꺼내고 상대의 의견을 물었다. 그녀들은 붉은 입술을 오물대며 대답했다. 

 남용과 억압을 두려워하는 성(性)이 천연스럽게 네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부끄러워 감추고, 견딜 수 없어 몽정을 하고, 목을 빼고 기다렸던 날들이 당연해지고 되레 대견스러워졌다. 말하는 중에는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가 물어뜯는 것처럼 전율이 일었지만 가볍게 몸을 흔들어 긴장을 달랬다. 

 작은 망사창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굳은 어깨를 폈다. 서로의 피부가 닿지 않아도 좋았다. 눈과 귀와 입으로 모든 것을 다 보고 만지고 느꼈고 그 떨림이 세포 깊숙이 전해졌다. 입술이 말라붙었다. 그러나 마른침을 삼키며 들끓는 아랫뿌리를 누르며 달래주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이것 또한 밀고 나가는 나의 힘이니까. 후드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시간으로 생각이 향했다. 12시 25분. 시침과 분침이 쏜살같이 달아나 취침시간 10시를 넘어 꼭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무단 외출은 엄격한 금지 사항이었다. 더군다나 취침 시간을 한참이나 넘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몇 시지?”

 이 한 마디에 텐트 안이 휘청거렸다. 그는 불타는 눈으로 목이 자작나무처럼 희고 가느다란 여자를 바라보다 소리쳤다.

 “늦었다!”

 “서둘러!”

 함포사격 같은 남방셔츠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두 남자는 인사를 하자마자 텐트 밖으로 뛰어 나갔다. 후드티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동쪽 해안가 레몬 팬션, 기억해둬요!”   

 퍽퍽 발이 빠지는 백사장을 비호처럼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그것도 한참을 늦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쪽잠을 자고 난 아침, 모두 밖으로 나갔다. 태양빛이 찬연히 비쳐들고 저 아래 푸른 옷을 입은 바다는 저 혼자 찰싹거리며 놀았다. 주장 선배의 호령 아래 엎드려 벋쳤다. 몽둥이찜질이 이어졌다. 내려치는 몽둥이가 피부를 뚫고 뼈까지 닿았으나 귓전에는 까르륵 대던 웃음소리에 버무려진 싱싱한 말(言)들 만이 폴짝대고 있었다. 

 엉덩이가 주저앉기 직전에 매질이 멈추었다. 이렇게 일찍 끝날 리가 없다고 여긴 후드티와 남방셔츠는 수상쩍게 수런거리는 팀원들을 올려다 보다 그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자작나무처럼 목이 가늘고 흰 그녀와 둥그렇게 부풀린 파마머리 여자가 저쪽에 머춤히 서 있었다. 자작나무 그녀의 손에는 그가 일부러 벗어놓고 온 운동화가 들려있었고, 양쪽을 번갈아 보던 팀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 챘다. 시샘과 부러움이 뒤섞인 질타가 이어졌다.

 “이 새끼들 더 맞아야 돼.”

 “아예 엉덩이 까!”

 “놔둬라. 좋은 일 하고 왔는데 걷지도 못하면 고스란히 우리 죄다.”

 “이것들을 그냥!” 

 팀원들은 갈매기 떼보다 더 시끄럽게 끼르륵 댔고, 얼굴이 벌개진 후드티와 남방셔츠는 모래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들이 주춤 주춤 다가왔다. 팀원들은 자리를 피해주었고 탱크탑에 시루스 티를 걸친 그녀들은 비너스보다 더 아름다웠다. 남방셔츠와 마주선 파마머리의 그녀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몽둥이질에 달아오른 건 엉덩이가 아니었다. 턱, 숨이 막힌 남방셔츠는 혀를 내밀어 바짝 마른 입술을 적셨다. 사랑은 뜨거워서 속수무책인 것이다.

 자작나무처럼 목이 가늘고 긴 그녀가 후드티에게 운동화를 내밀었다. 후드티는 멋쩍게 웃으며 다가갔다. 그녀와의 사이가 한 걸음도 되지 않았다. 얼굴을 밀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갔다. 마치 사랑의 시작점 같았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 뭐야!

 후드티와 남방셔츠는 동시에 소리쳤다. 결정적인 순간에 스크린 밖으로 튕겨나와 버렸던 것이다. 이럴 수 없다고, 안 된다며 다시 스크린 속으로 뛰어 들었지만 순백의 울트라 비드 스크린은 푸른 청춘의 몸부림을 따라 팔랑거릴 뿐이었다.

 미치겠네. 미치겠어. 

 후드티와 남방셔츠는 방방 뛰다 스크린을 걷어차다 종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바닥에 벌렁 나자빠져 몸부림을 쳤다. 일초만 더 있었어도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었는데…… 

 으아아아아……

 새된 비명을 지르며 한바탕 발광을 하고 나자 기운이 쭉 빠지고, 조금 전의 환상을 더듬어 볼 여유가 생겼다.    “페니스에 뼈가 없냔다.”

 남방셔츠가 키득거렸다.

 “생물 선생님이 중요한 걸 안 가르쳤나봐.”

 후드티 또한 낄낄거렸다. 아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워 죽을 지경이었다. 

 “너도 뼈 없지?”

 남방셔츠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내 건 물건이 아니냐?”

 후드티가 어이 상실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남방셔츠가 후드티의 어깨를 쳤다.

 “알아. 얀마. 우리도 빳빳한 남자인데 여자들하고 말 한번 섞어 보지 못한 게 한이 되어서 그런다. 너는 그런 생각 안 드냐?” 

 “그러니까 더 약이 오르지. 진짜 한번 사귈 기회가 왔는데, 어떻게 거기서 끊어져 버리냐고!”

 “그건 현실이 아니잖아. 우리에겐 현실적인 용기가 필요해. 우리도 용기를 내봐야 하지 않겠냐?”

 대자로 벋은 남방셔츠와 후드티는 마구 떠들어 댔다. 막상 말해보니까 별 거 아니었어. 아주 노골적인 말도 막 했잖아. 아으, 꿈틀거려서 죽을 뻔 했네. 야, 난 터지는 줄 알았다. 진짜 속으로 제발, 제발, 숨죽여라, 숨죽여라 빌었다니까. 말문만 트이면 그 뒤로는 쉬울 텐데. 맞아, 시작이 중요한 거야. 그럼, 네가 먼저 말 걸어 볼래? 다음은 내가 책임질게. 눈가리개라도 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안 보면 겁나지 않을 테고, 그럼 하고 싶은 말을 막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선글라스 쓰고 나가볼까. 날씨도 더워지고 있으니까. 너하고 나하고 선글라스 쓰고 거리를 걸으면 영화 찍는 줄 알겠다. 수수깡과 맷집의 조화라고나 할까? 여자들이 아주 조~아 하겠다. 좋아, 그럼 선글라스는 빼. 그 대신 네가 먼저 말 걸어. 괜찮은 여자를 보면 무조건 말을 걸으라고. 네가 한 마디 하면 그 다음에 내가 한 마디하고…. 니가 먼저 말 걸어. 그럼 그 다음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오 각성하여 곧바로 실천 하지 않았다간 마흔 살이 될 때까지 키스 한번 안 해본 남자들이 될지도 몰라. 으,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진다. 기다리다 지친 내 입술은 낙엽처럼 말라붙고 구멍만 숭숭 뚫릴 테지. 어쭈, 키스까지 기대하고 있냐. 키스로는 만족 못해. 더 찐하게 밀어부쳐야지. 오옹, 생각만 해도 쿵쾅거린다. 어쭈, 어쭈, 아주 비벼라 비벼……

 남방셔츠와 후드티는 끝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고 처방을 제시했다. 부루가 끼어들 틈이 없었고 끼어들 필요도 없었다. 몇 시간 그러노라면 두 사람에게 사랑의 용기가 싹을 틔울 것이다. 그때 부루는 미약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 마법으로 만든 사랑의 미약은 두 사람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며, 언덕을 내려가 횡단보도 앞에 선 숙녀들에게 정중히 뜻을 내비칠 것이며, 이윽고 욕을 얻어 듣든지 휘파람을 불게 되리라.    






이전 02화 사랑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할지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