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야기- 풍랑 뒤에
사람들은 깡통집 부루의 소문을 믿지 않았다. 깡통에게 의지가 있으며 시끄럽게 떠벌린다는 말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반가워하기보다 두려워해야 할 일이었다. 버스에 올라타 카드만 대도 알아서 떠드는 세상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센서의 작용일 뿐이고, 결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깡통집은 범위는 물론이고 규제 기능 조차 없었다.
깡통집 부루에 대한 소문이 설왕설래 하는 중에 한 여자가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봄빛이 완연한 평일이었다. 그녀는 마치 수년 만에 햇빛을 본 사람처럼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조심스럽게 하늘을 올려다 본 후 힘겹게 발을 뗐다. 언덕 위로 올라간 그녀는 페인트칠이 잘 된 깡통집을 바라보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들은 바에 따라 깡통집의 발가락을 밟았다.
첫 번째 방문자는 분명히 오른쪽 세 번째 발가락이 출입문 버튼이라고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첫 번째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왼쪽 네 번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결코 문을 열지 못했다. 열 개의 발가락을 아무리 밟고 눌러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제멋대로였다.
여자는 왼쪽에서부터 차례차례 발가락을 밟았다. 오른쪽 다섯 번째 발가락을 밟았을 때에야 문이 5센치쯤 열렸다가 닫혔다. 여자는 낙담했다. 그렇잖아도 기운이 빠져 서 있을 힘도 없는 판에 깡통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오른쪽 새끼발가락부터 차근차근 밟았다. 땅 위의 건반을 누르듯이 지긋하고 조심스러웠다. 왼쪽 다섯 번째 그러니까, 맨 끝 버튼까지 갔을 때에야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여자는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들어가는 게 이렇게 까다롭다면 나오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여자는 고개를 쭉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여자가 좋아하는 로즈 향이었다. 그녀는 이끌리듯 깡통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정오의 빛이 천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라고 연거푸 불렀다.
“있어요. 나 여기 있잖아요. 예쁜 아가씨.”
“어디 있어요? 모습이 안 보여요?”
여자는 사방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여자가 정면 벽을 바라보는 순간, 수염자리가 거뭇한 남자 얼굴이 비쳐졌다 바로 사라졌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낼 정도로 놀란 여자는 뒷걸음질을 쳐 재빨리 문손잡이를 잡았다.
“놀라지 말아요. 놀라지 마. 그렇게 놀라니까 내가 미안해지잖아요. 그래서 내가 모습을 안보이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어쩔 줄 모르며 말했다.
“아아, 미안해요.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는데, 여기 나쁜 곳은 아니죠?”
“그랬다면 벌써 그런 소문이 벌써 좍 퍼졌겠지요. 그리고 경찰들이 나를 가만 놔두었겠어요. 해머로 때려 부숴서 철거해버렸겠지요. 안 그래요?”
“그러긴 한데……”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문을 조금 열어 놓고 얘기를 나눌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출입구가 조금 열렸다. 그녀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이 열리자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 목소리는 그녀에게 소파를 권했다.
소파는 마치 여자의 몸에 맞게 재단된 것 같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그녀를 품에 안듯이 감싸고,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에 맞게 변형되었다. 몹시 지쳐있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눕다시피 했고 아주 오랜만에 작은 평온을 맛보았다.
“마음 편하게 쉬어요. 내 조언이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만큼 해드릴게요.”
“너무 답답해서 왔어요. 웃기는 로봇이 말을 잘 들어준다고 해서 말이에요.”
“웃기는 로봇?”
웬 놈이 이런 소문을 냈나 싶었다. 내가 웃기면 세상이 온통 코미디겠다란 냉소가 터져 나왔지만 부루는 마음과 다르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맞아요. 난 웃기는 로봇인데 속상하면 울기도 해요. 나도 감정이 있으니까요.”
“감정이 있다고요? 로봇이 말이에요?”
“날 만든 사람은 마법사였거든요. 그 사람의 감정이 이입된 거죠. 어쨌든 한참을 혼자 있었더니 몹시 외로웠어요. 예쁜 숙녀분이 와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그렇군요. 그럼 배고픈 것도 느끼나요?”
“당연하지요. 내 에너지는 태양인데, 여러 날 햇빛이 들지 않으면 배고파 쓰러질 지경이지요. 구름 낀 우울한 날엔 기분이 그렇고요.”
“난 흐린 날이나 비오는 날처럼 우울한 날을 좋아하는데, 나하고 다르군요.”
“설마, 전부터 그런 날씨를 좋아한 건 아니죠? 이렇게 눈이 맑은 숙녀분이 어떻게 흐린 날을 좋아 할 수 있겠어요. 아주 예쁜 눈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예쁜 눈이에요.”
부루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그도 여자의 눈이 예쁘다고 했다. 그의 암울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맑은 눈이라서 겁이 난다고 했는데, 정말 겁을 먹었는지 어느 날 그녀를 떠나고 말았다. 그 자신과 어울리는 여자를 만났다는 말을 남기고.
한동안은 헷갈려서 슬퍼하지도 않았다. 예뻐서 겁이 나다니,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말의 의미를 안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반짝이는 눈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전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구실을 붙이든 믿어주었고, 그의 구차한 변명들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종종 그녀가 쓰지 않는 향수 냄새를 맡아도, 그의 자동차에서 그녀의 것이 아닌 귀걸이나 머리핀 등이 나와도, 그가 쩔쩔매며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이 안타까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그를 사랑하는 일,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온종일 그의 생각에 빠져있었으며, 그를 위한 일, 그를 기쁘게 하는 일만을 모색하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다른 여자에게로 가버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설마 그 때문에 당신의 사랑까지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부루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여자의 대답은 전사처럼 결연했다.
“끝이에요. 더 이상 사랑이 남아 있지 않아요. 이제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예요. 그처럼 멋진 남자를 만날 수도 없겠지만, 모든 남자들은 그처럼 속임수가 능할 테고, 언제라도 나를 버리고 떠나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주변을 보세요. 모두 사랑의 배신 때문에 괴로워 우는 건 아니잖아요. 대부분의 사랑은 그렇지 않아요. 그런 일은 어쩌다, 그러니까, 천만 명 중에 한 명 정도, 아, 그보다는 조금 더 많고, 백 명 중에 한 명 정도, 아니 그보다는 더 많지요. 다섯 명 중에 한 명 정도? 그러니까, 그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다니까요.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살다보면 누구나 한두 번 겪지 않을까요? 그렇죠? 친구들도 그러지 않나요?”
“아니에요. 나만 그랬어요. 한 마디로 난 재수 없는 여자에요. 앞으로 사랑 따위 결코 하지 마라는 계시를 받은 거예요. 난 이제 어떻게 해요. 누굴 좋아할 수도 없고, 누군가가 날 좋아하지도 않을 거라고요. 진짜 그럴 거예요. 으흐흐흐흑……”
“아니라니까요. 누구나 겪는 일이라니까요. 주변의 희희낙락거리는 연애쟁이들도 다 그런 과정을 겪고서 연애의 고수가 된 거라고요. 그만 울어요. 우는 건 딱 질색이에요. 아으, 폭발할 것 같아요. 난 그렇게 못된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한다고요. 폐깡통을 우그리듯 우그려뜨려야 하는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어떻게 생겼어요? 내 주먹은 강철로 되어 있다고요. 아아, 울지 말아요. 세상에 남자가 그 뿐이라 해도 그런 남자는 잘 떠나간 거예요. 진짜 잘 된 일이라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난 정말 그를 사랑했단 말이에요. 난 이제 어떻게 해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난 껍데기만 남았을 뿐이에요.”
“껍데기만 남았다고요? 그런 얼토당토 않는 말이 어디 있어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제발 그만 울어요. 자꾸 울면 진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자자, 진정하고 그림 감상 좀 해 볼래요? 글씨가 눈에 들어오면 읽어보고요. 마음을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부루는 안절부절 못하며 여자를 달랬다. 여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점점 소리 높여갔다. 부루는 뭐라고 중얼 중얼거렸는데, 욕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그게 진짜 주문이었는지 천창 덧문이 스르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실내가 깜깜해지자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천정으로 빔이 쏘아졌다. 푸른빛을 따라 영상이 펼쳐졌다. 성곽이 둘러쳐지고 성의 꼭대기에서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화면을 본 그녀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장면이 바뀌고 쏴아쏴, 거친 물결이 일고 있는 바다가 펼쳐졌다. 또 다시 장면이 바뀌고 평온해진 물결 위로 글씨들이 나열되었다. 여자의 눈이 글자를 따라는 가는 동안 소파 가장자리가 시트처럼 늘어나 그녀를 푸근히 감싸주었다.
어느 왕국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의 얼굴은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으며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머리카락은 밤물결처럼 흘러내렸다. 임금님은 공주를 볼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한 송이 꽃”이라고 했고, 왕비님은 ‘나의 찬란한 보물’이라며 공주를 끌어안았다.
숙녀가 된 공주는 관례에 따라 사교와 처세를 배우고 무도회를 열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익혔다. 공주 또래의 신사 숙녀와 친분을 맺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알아갔다. 고매한 선생의 강의가 보다 높고 깊은 생각을 배우게 했다면, 무도회는 사람은 얼마나 다양한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등은 물론이고 마음의 설렘과 감정의 고양을 가르쳐주었다.
공주는 왕궁 밖의 무도회에도 초대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들떠 시끄럽게 왕궁 밖으로 떠나는 공주를 임금님과 왕비님은 매우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공주는 목을 빼고 앉아 왕궁 밖 무도회를 기다렸고, 나갔다하면 한 밤중이 되어서야 들어오는 일이 잦아지자 결국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공주의 가정교사인 남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왕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남작부인은 공주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배우는 것이라며 그것은 왕궁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임금님과 왕비님을 설득했다.
남작 부인은 백작의 딸로 태어났으나 불운하게도 일찍 부모를 잃고 각처를 떠돌며 많은 일을 경험했다. 남작과 결혼도 했으나 두 달 만에 버림받았다. 그러나 다행이 대공부인의 추천으로 공주의 가정교사가 되어 왕궁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남작부인은 공주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숙녀에겐 친구와 연인이 몹시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왕궁 밖의 무도회는 왕궁의 축제와 비교할 수 없었다. 마차 바퀴 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설레 어쩔 줄을 몰랐다. 최고의 즐거움은 왕궁 밖에 다 있었다. 공주는 설렘과 환상을 산만큼이나 품고 무도회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때때로 공주는 왕궁의 대표로 무도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누구보다 우아하게 처신을 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때에는 마차가 무도회장에 도착하기 전에 신분을 드러낼 만한 것들을 모두 벗어던졌다. 공주가 머리를 풀어 내리고 얼굴에 주근깨를 박아 넣으면 바깥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처럼 풋풋해 보였다.
청춘은 한없이 발랄하고 정오의 태양처럼 붉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만사 OK는 아니었다. 권력과 위엄을 갖춘 공주라 해도 남자, 연정, 무관심, 욕망, 자존심, 외로움… 등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아무 때나 나타나 마을을 들뜨게 하고 아무 때나 가버려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외면당한 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멋진 남자와의 댄스에 들떠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다. 안달하면 안달할수록 멀어져 가는 것이 연정이었지만, 그보다 더 판타스틱한 상상은 없었다.
봄이 무르익어 밤공기조차 달콤하던 날, 공작의 대저택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사윗감을 찾으려고 연 파티였던 만큼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사방에서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아름답게 성장한 숙녀들 또한 커다란 홀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주가 드레스 자락을 끌며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드레스를 밟았는데, 앞 사람이 치고 가는 통에 나무인형처럼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 때, 한 남자가 날쌔게 팔을 벋어 공주를 잡아 일으켰다.
공주가 수줍은 미소로 감사를 표하자, 그녀의 미소에 답하듯 청년은 공주를 감싸 안아 사람들과의 사이를 벌려주고 괜찮냐고 물었다. 두 사람이 포도주 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젊은 신사 숙녀들이 짝을 이루어 홀의 한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청년이 빙긋 웃으며 공주에게 춤을 청했다. 공주는 남자와 함께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게 춤을 추었다.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아쉬움에 손을 놓았고, 다시 연주가 시작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가까이 다가서고 귓속말을 나누고 타는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갔다. 바이올린이 마지막 현을 그었다. 파티는 끝나고 사람들은 제각각 흩어져 손을 흔들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채 홀을 빠져나왔다. 공주의 손을 잡은 청년이 다급히 물었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공주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 이렇게 말해버렸다.
“내일 밤에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언덕 너머 너도밤나무 숲에서요.”
“물론이지요. 달이 지기 전에 당신을 꼭 만나고 싶어요.”
두 사람은 노랗게 분광을 뿜는 쪽달을 두고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마차를 타고 궁으로 돌아온 후에야 공주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남작부인 조차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굴려도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마법을 부려 왕궁을 빠져나간다거나, 남자가 자객으로 변장하고서 공주의 침실로 침입해 들어온다거나, 왕궁에 불이 나 모두 밖으로 도망칠 때 공주는 남자를 만나러 언덕으로 뛰어 올라간다거나…… 등, 실현 가능성 없는 스토리만 머릿속에서 우왕좌왕거렸다. 그러나 청년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숨이 멎어버리고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살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해야 했다.
공주의 하소연을 들은 남작부인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달님을 대신 보내는 수밖에 없어요.”
“아, 말도 안 돼요. 그가 얼마나 실망할 지 잘 아시잖아요. 절 좀 궁 밖으로 내보내주세요. 어떻게 해서든지 나가도록 해줘요. 시체마차(죽은 사람을 묘지로 실어 나르는 마차)라도 타고 갈게요. 제발요!”
공주는 애원했다. 남작부인은 자신이 지나치게 공주를 감싸고돌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통에 공주는 분별력을 잃었으며 왕궁의 체신을 떨어뜨리는 것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왕궁 밖 무도회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남작부인이 단호히 말했다. 남작부인이 안된다면 안 되는 것이었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부인은 냉정한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더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다음 날 밤, 공주는 창문을 열어놓고 밖으로 나갈 기회만 엿보았다. 저녁식사가 끝났는데도 시종들은 분주히 오가고 창을 든 병사들은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던 공주는 급기야 창문에 매달린 채 곤두박질을 시도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남작부인은 호되게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옷을 한 벌 가져왔다.
남장을 한 공주는 병사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 왕궁의 담을 넘어 말을 타고 너도밤나무 숲으로 달려갔다. 숲에 들어가기 전에 드레스를 꺼내 입는 공주의 가슴은 터질 듯이 뛰었고, 나무들은 수런거리며 조바심 속에서 길을 비켜주었다.
누가 연정을 샤베트와 비교했으며 솜사탕과 견주었던가. 그가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그녀는 눈처럼 녹아내렸다. 달빛과 별빛이 씨줄과 날실로 엮여 휘장처럼 드리워진 숲에서 그와 마주보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어깨에 기대는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잊었다. 세상의 모든 단맛을 섞은 것보다 더 달콤한 그의 숨결만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어둠을 가르며 달려와 그와 만나는 너도밤나무 숲은 새로운 왕궁이었다. 달빛 별빛 드리워진 새로운 침실에서 그가 속삭였다. 푸른 알록무늬 지구는 그녀가 있어 아름답다고. 그와 그녀의 사랑으로 인해 원활히 작동되는 행성이라고. 아, 지구를 위해서라도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임금님과 왕비님의 눈을 속여야 했다. 공주는 매일 밤 왕궁의 담장을 넘으며 아슬아슬한 사랑을 이어갔다.
그렇게 청춘의 거침없는 말을 타고 달리던 어느 날, 공주는 조금 늦게 숲에 도착했다. 그가 화를 낼까? 무슨 말로 그의 마음을 풀어줄까? 마음을 졸이며 숲으로 들어섰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십분도 못 기다리고 숲을 뛰쳐나갈 사람은 아니었다. 장소가 바뀌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 공주는 숲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찾아 다녔다. 나뭇가지에 긁히고 꺾어진 나무 둥치에 걸려 넘어지며 헤매고 다녔지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공주가 늦도록 나타나지 않자 남작부인은 직접 찾으러 왔다. 공주는 어둠이 꽉 찬 숲속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남작부인이 공주를 부를 때까지, 그녀가 공주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 안을 때까지, 한 마리 날개 찢긴 새처럼 퍼덕거렸다. 남작부인은 공주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말했다.
“오오, 몸이 얼음장처럼 차요. 큰일 나겠어요. 어서 빨리 돌아가요.”
“아, 안돼요. 아직 그가 오지 않았어요. 안된다고요.”
공주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길을 잃었는지, 오다가 어떤 함정에 빠졌는지, 누군가 그의 발을 잡고 있는지, 그는 그녀가 모르는 몹시 난처한 상황에 빠져서 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이제야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주가 숲을 빠져나가 왕궁을 향해 말을 달리는 순간 그가 도착할지 모른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왕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달이 이울고 별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는 아무런 연락도 없고, 바람 편에 편지 한 줄 보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둘 사이가 끝났다. 라고 말해주고 있었지만 공주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작부인이 달래고 위로해 주어도 공주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남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 공주님. 내가 그 마음 잘 알지요.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여기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침상을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그 말에 공주는 남작부인을 올려다 보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공주가 왕궁 밖에서 잤다는 사실이 임금님께 알려지는 날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도록 난리가 나는 건 물론이고 남작부인은 왕궁에서 쫒겨날 것이고, 청년을 찾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며, 그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공주는 꺽꺽 눈물을 쏟았다.
남작부인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청년은 공작의 먼 친척으로 이미 정혼한 여자가 있으며, 그녀의 지참금 없이는 거처할 집도 마련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약혼녀는 청년의 소행을 눈치 챘고 당장에 파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공주는 병을 핑계 대고 두문불출했다. 임금님과 왕비님의 방문에도 눈물만 글썽거릴 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의원을 부르고 영양식을 만들게 했지만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실연은 바로 삶의 블랙홀이었다. 사방이 몽롱한 안개에 싸여 있었고 머릿속은 텅 비고 전신은 무력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와의 달콤한 순간들이 밀려들었고, 눈을 뜨면 암담한 현실이 숨통을 막았다. 그가 없는 나날이라니! 앞으로 그와 손을 잡고 입맞춤하지 못한다니! 그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다니!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절망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세상의 온갖 비애들이 몰려왔다. 배신감, 끝장, 복수, 처절한 기분, 불행, 농락, 역겨움, 감옥, 찢어져 너덜거리는 마음, 죽음…… 등 그녀가 알고 있는 더럽고 괴로운 감정들이 그녀의 목을 조였다.
불면의 밤이 이어졌고 공주는 창백히 야위어 갔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자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았고 원망과 아쉬움도 가라앉더니 말라붙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고 밤이 깊을수록 눈은 더 말똥거리는 것이었다. 남작부인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공주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아요.”
“바다는 멀리 나가지만 곧 되돌아와요.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해요.”
공주의 야윈 뺨을 어루만지며 남작부인이 말했다.
“바다물이라도 가득 차오르면 좋겠어요. 그러면 쓸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 차오르고 있어요. 속도가 느려서 알아채지 못하는 것뿐이죠.”
“아니에요. 제 마음은 이미 텅 빈 데다 완전히 찢어져버렸어요. 다시는 예전처럼 명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내 말을 들어봐요. 밤새 거친 폭풍에 시달렸던 바다가 아침이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거 봤잖아요. 이전보다 더 맑고 푸르게 출렁거리잖아요. 미친듯이 뒤집어지고 바닥의 잔모래까지 끌어올려 솟구치다 곤두박질치며 격랑에 휩쓸리고 다시는 ‘바다’라고 불릴 수 없을 만큼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는데도 말이에요.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다음의 바다 속 변화에요. 한바탕 뒤집혀지고 난 바다는 산소를 왕성히 뿜어내고 플랑크톤은 굉장히 풍부해진대요. 물고기들은 더 활발하게 바다 속을 누비고요. 지독하게 앓고 난 후 바다는 이전보다 훨씬 풍요롭고 강해진 거예요.”
“ 말도 안돼요. 고통은 모든 것을 삼켜 메마르게 할 뿐이에요.”
“높고 험한 산을 넘어가는 이유가 뭐죠? 여기서 저기까지 땀 흘리며 뛰는 이유가 뭐죠? 뒤따라 차오르는 어떤 힘 때문이지요. 캄캄하고 두려운 터널을 통과한 뒤에는 어둠의 공포를 알게 되고 견디는 방법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요.”
“정…말…요? 저도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견디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잖아요. 이겨내서 위해서 그렇게 뒤집혀지고 고꾸라지며 괴성을 질러댔던 거예요. 그러는 와중에 많은 것을 깨닫고 굉장히 중요한 것들을 배웠어요. 사랑의 혼란이 무엇이며,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 그런 것과 맞부딪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말이에요. 또 세상은 그렇게 지독한 혼란 속에서도 끄떡없이 견디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이에요. 몸부림은 새 힘을 끌어올렸고, 그 힘은 새로운 안목과 새로운 의미를 선물로 주었어요. 아직 고통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어 느끼지 못하지만 분명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고 있어요. 그것을 증명해볼까요?”
남작부인의 말에 공주는 작게 웃음 지었다.
“봐요. 지금 웃었잖아요. 방금 전만 해도 웃을 수 있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예쁘게 웃잖아요. 그리고 어제보다도 오늘 얼굴이 훨씬 밝아져 있고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잖아요.”
그 말에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어제만 해도 말이 입 밖으로 새나간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고 이대로 굳어 사라지는 것만 상상했으니까.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공주는 물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거센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홀쭉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문득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기분은 가벼워지고 배는 죽어라고 고팠다. 공주는 남작부인이 가져온 죽을 허겁지겁 먹었다. 묽은 죽은 허기를 더 부채질 했다. 공주는 식당으로 달려갔고, 음식이 나오는 대로 먹어치웠다. 그런 다음 방으로 돌아온 공주는 또 포테이토칩을 두 통이나 먹고, 꺼실꺼실한 입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었다. 배가 불룩해졌고 포만감은 공주를 두둥실 띄어 올렸다.
마음이 가라앉자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왕궁을 오가는 모든 사람의 시간의 족적 안에는 달콤하고도 쓰디쓴 연애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굽은 등과 쳐진 어깨와 힘없는 발걸음에 무겁게 드리워진 삶의 고통이 그녀의 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공주는 한결 차분한 표정으로 선생들의 강의를 경청한 후에는 후원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다. 밤이면 늦도록 남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이든 여자와 젊은 여자의 거리낄 것 없는 수다였다. 공주는 그 남자의 미끄러지는 턱 선과 오목한 턱 보조개에 대해 떠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 왜 잘생긴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요?”
공주의 말에 남작부인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잘생긴 사람을 보면 누구나 끌려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걸 주체하지 못하고 아예 정신을 꼴아 박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에요.”
“그럼, 전 꼴아 박는 쪽이네요.”
공주가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랬어요.”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공주는 펄쩍 뛰어 남작부인 앞으로 다가앉아 졸랐다. 남작부인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남자들과의 사연을 꺼냈다. 돌조각처럼 무뚝뚝한 그녀의 입이 치즈케익을 맛보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백 개의 골짜기를 맨발로 지나온 것처럼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내.
지금 생각해도 미쳤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며 남작부인은 담담히 말을 마쳤다. 눈물까지 글썽이던 공주는 부인의 팔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
“그럼, 나 앞으로 더 그래도 되는 거예요!”
……뚜욱, 뚝.
남작부인이 활짝 웃으며 대답하려는 찰나에 빔이 꺼졌다. 어어, 뭐라고 했지? 여자는 당황한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정전인가? 어떻게 하지? 여자는 소리가 사라진 어두컴컴한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위험이 엄습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고 있을 때, 천창 덧문이 열리고 햇살이 들어와 실내의 부분 부분을 일으켜 세웠다. 여자는 긴장했던 어깨를 늘어뜨리며 다시 소파 속으로 잠겨들었다.
남작부인이 어떤 말을 했을지 안 봐도 뻔하긴 했다. 아주 뻑뻑하고 잔소리 많은 여자라도 실연이 연애 자체의 종결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 단지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 목소리에 등 떠밀리고 싶었다.
그때, 깡통집의 목소리가 여자의 상념을 깼다.
“난 남작부인 만큼 단호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은 참 아름다워요.”
그 말에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 상황에 농담이라니. 아니, 그런데 내가 웃었잖아.
“그래요. 웃어요. 웃어야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니까요. 웃고 나니 한결 낫죠? 실연은 삶의 한 과정일 뿐이에요. 아름다운 장미꽃을 만졌다가 그 가시에 찔린 것뿐이라고요. 몹시 아팠고, 아픈 와중에도 꽃의 환상을 지우지 못해 깊은 고통에 잠기기도 했지만 당신은 잘 견뎌냈어요. 견뎌낸 만큼 마음은 그만큼 커지고 단단해졌죠. 또 다른 열정을 만나 활활 태우고 태워도 결코 망가지지 않을 만큼요.”
“고마워요. 당신에 대한 갖가지 소문 중에서 난 좋은 소문만 믿었어요. 그래야만 내가 여기 올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내 선택이 옳았어요. 당신은 굉장히 웃기고, 멋지고, 말을 잘하는군요.”
“오우, 이것 봐요. 내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어요. 칭찬은 아주 좋은 거군요.”
부루의 너스레에 여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울음과 웃음은 감정을 실어 나르는 거룻배다웠다. 울고 있을 땐 세상이 온통 눈물바다인 것 같은데, 소리 내어 웃자 세상이 웃음 구슬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여자는 머리를 매만지고 손바닥을 비벼 볼을 문질러 표정을 추슬렀다. 그런 후 목소리가 흘러나온 쪽을 향해 깊이 목례를 하고 깡통집을 나왔다. 진초록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봄날을 동실 동실 띄워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