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집 김장하느라 허리가 휘었다
그랬다. 다 해 놓은 김장 김치통에 담아 두었으니 가져가라고 하면 넙죽 '고맙습니다' 인사부터 하고 부리나케 달려가도 봐줄까 말까 한데, 전화를 받고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다 김치가 익어 빨리 김치냉장고에 넣어야 한다고 감정 실린 언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부랴부랴 언니 집으로 달려가는 나는 볼썽사나운 동생이었다.
몇 해 전 김장철.
다섯째 언니를 따라 배추를 뽑아 절이는 첫 단계부터 끝까지 손품 발품을 팔며 따라다녔다. 대형마트가 아닌 시장을 누비며 김장 장을 보는데 재미도 이런 재미가 없었다. 왁자한 시장통에 바퀴 달린 바구니를 끌며 꼬부랑 할머니부터 갓난쟁이를 둘러업은 새댁까지 모두 장을 보러 온 듯 활기차고 역동적인 시장 골목은 말 그대로 '새 세상'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나는 이 풍경도 못 보고 다른 지역 작은 시장 골목의 뻥튀기 사진이나 찍으러 다니던 폼생폼사 어설픈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집의 김장은 다 맛있다는 것은 진리다.
그리하여 김장은 잔치다!
잔치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모두 다섯째 언니 혼자 다 했단다.
다섯째 형부가 농사지은 항암배추 -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먹거리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나 보다 - 170포기를 자르고 다듬고 절인 다음 씻어 물을 빼놓은 어여쁜 자태. 자꾸자꾸 떼먹고 싶을 만큼 달고 짭조름하다.
온갖 재료 -디포리 다시마 생강 새우 머리 뭐뭐뭐.. 기억 안 남- 왕창 넣어 우린 맛국물에 고춧가루와 마늘(두 접, 까는데 꼬박 이틀) 넣고 쪽파 다진 것과 언니네 밭에 저절로 자랐다는 기특한 갓(너무나 이뻐 꽃병에 꽂아두고 싶었다)도 쫑쫑 썰어 찹쌀풀 끓여 붓고, 액젓 넣고 굵은소금 녹여 이렇게 서로 친해지게 저었다. 셋째 언니의 팔뚝이 해마다 굵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일 수도 있겠다.
이제 하루 종일 말 그대로 김장을 담그는 일만 남았다. 컨베이어 벨트라는 것도 없는데 뭔가 기계장치에 의존해 저절로 돌아가는 듯한 김장 양념 치대기.. 그 와중에 입맛 까다로우신 셋째 형부 바지락 칼국수로 점심해달라 신다.
양념을 껴입은 배추를 맵시 있게 감싸 통에 담아 가득 담으면 기다리고 있던 조카와 조카사위가 잽싸게 가져가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싱싱한 갓으로 꼼꼼하게 위를 덮어 뚜껑을 채운다. 그렇게 만든 다섯 집 김장 22통. 김치 냉장고 통들이 제 집을 못 찾을까 유성 팬으로 이름을 적어야 한다.
남은 배추는 덤벙 김치를 담는다. 남은 김장 양념에 맛국물을 넣고 소금과 액젓으로 간을 하여 김칫국물을 만든다. 땅에 묻어놓은 항아리에 배추를 뒤집어 차곡차곡 넣고 -샛노란 배추 속의 색감 유지- 김칫국물 붓고 다시 배추 채우고 김칫국물 붓기를 반복해 항아리를 채운 다음 깨끗하게 씻은 반들반들한 돌을 얹어 배추들을 가라앉힌다. 동치미도 아니면서 시원하기가 그지없고 먹고 나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덤벙 김치는 해가 갈수록 인기가 높아져 이제는 반반 비율로 담는다. 올해는 항아리 하나를 통째로 꿰차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항아리에 내 이름 적으라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덤벙 김치가 익어 갈 작은 항아리 하나가 나를 세상에서 가장 만족한 사람으로 추대한다.
정산은 귤 상자 한 귀퉁이를 찢어 대충 언니가 적는다.
어디 이 것뿐이랴. 그 아래 써 내려갈 품목들이 송알송알 싸리 잎에 투명한 은구슬처럼 달려있을 테다.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김장김치 맛나게 먹고 세상에 잘 쓰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