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기: 김광진 <편지>

글쓰기 수업 후기(3)

by 연꽃 바람

음악 속 화자를 주제로 한 글쓰기 수업에서 김광진의 <편지>를 오랜만에 다시 들었다. 수업을 이끄는 작가님은 요즘 노래로 이하이의 <한숨>을, 옛날 노래로 김광진의 <편지>를 골라오셨다. 하지만 놀랍게도 옛날 노래인 김광진의 '편지'를 처음 듣는다는 수강생들이 많았다. 오히려 처음 들었기 때문에 더 집중하고 선입견 없이 노래를 하는 화자에 집중하셨던 것 같다.


이 노래는 오래전 나의 '가을' CD에 들어있던 곡이다. 한창 CD에 음악을 구워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던 때에 '가을'이라는 제목으로 20여 곡을 담아 주변 친구들에게도 나눠 줬었다. 윤상과 김동률이 함께 부른 <When October Goes>의 라이브를 첫 곡으로 하여, 윤동주의 '편지'라는 시에 곡을 붙여 안치환이 부른 <편지>, 김광진의 <편지>, 김민기의 <가을편지>,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등이 수록된 나름 나만의 명반이었다. 가을이 되면 차에서 항상 그 CD를 들었었다. 그렇게 가을의 분위기에 젖어 김광진의 <편지>를 들을 때는 사실 가사에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가사를 살피며 노래를 보다 보니 다른 것이 보였다.


https://youtu.be/D_1OStc6Cm4


그것은..... 찌질남이었다.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스르려 했고, 상대방이 기나긴 침묵의 시간 동안에도 사랑이라 말하며 마음을 놓지 않았던 남자로 보였다. 그대 있음에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을 감사한다고 했지만, 그 힘겨운 날들에 더 힘들었을 원치 않는 열렬한 구애를 받았을 '그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요즘은 10번 찍으면 안 넘어가는 여자가 없다면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끼질을 해대는 일은 스토킹일 뿐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사연을 알고 나니... 정말 화자는 도끼질을 하던 남자였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김광진의 아내인 허승경이다. 허승경이 쓴 가사는 한 통의 편지를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김광진을 사귀고 있을 때 김광진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부모님이 억지로 선을 보게 한다. 선을 본 남자는 허승경에게 구애를 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그 남자는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보내고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그 편지의 내용을 다듬어 <편지>라는 노래가 된 것이었다.


이 사연을 알고 나니 그 남자보다 그 편지로 작사를 한 아내의 가사에 곡을 붙여 직접 노래를 부른 김광진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려본 노래 속의 화자는 '장수생'이었다. 재능은 없지만 좋아한다는 이유로 어떤 일을 오랫동안 '준비'하던 사람이다. 분명 그 일은 나의 일이 아님을 알지만 해왔던 일이기에, 그 일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실패를 겪고 나면 다시 다음을 관성적으로 준비해서 재수가 삼수로, 사수로, 그리고 장수로 이어져 버린 사람이다.


될 듯, 조금만 하면 이번엔 정말 될 듯하여 어떤 일을 늘 해왔던 대로 '준비'만 했던 그 사람은 끝내 '기나긴 그대 침묵은 이별로 받아 두겠소'라며 그 일을 접는다. 그래도 기나긴 청춘의 시간 동안 그 꿈이 있었기에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을 감사한다고 말하며 끝을 말한다.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 않으리라,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며 가까스로 손 끝으로 잡았던 그 꿈의 치맛자락을 놓는다.


그런 화자를 생각하며 노래를 들으니 처연하지만 결연한 노랫말이다. 그저 사랑했던 마음만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화자의 마음은 그 오랜 시간에 대한 후회보다는 드디어 미련을 놓은 후련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가을 저녁, 글쓰기 수업에서 조용히 낯선 사람들과 함께 듣는 이 노래는 익숙한 듯 생경했다. 같은 노래를 듣고 있지만 모두 다른 노래를 듣고 있었다. 각자의 경험과 만난 그 노래는 다르게 읽혔고 다르게 그려졌다. 단조로운 피아노 선율 위에 덤덤한 목소리로 부른 그 노래는 풍성한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되어 웅장해졌다. 여럿이 함께 읽고 듣고 나누는 일은 늘 뜻밖의 이야기가 있어 즐겁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누군가의 한숨을 듣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