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에 대하여
대학에 입학했다는 문자가 왔고, 그해에는 스승의 날에도 새해에도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잘 지내고 있으려니 했다. 그러다 문득 대학 2학년 때쯤인가, 집에 다니러 왔다면 전화가 와서 만나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눴다. 초등학교 때 기억했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른 쇼트 커트에 어른의 느낌이 나는, 몸집도 마음도 부쩍 자라 버린 지혜를 만났다. 지혜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자신이 느끼는 세상의 속도와 자신의 속도에 대한 여러 인터뷰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지혜의 모습이 있었고, 지혜가 속한 세계의 사람들이 등장해 속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자신이 에스컬레이터 위에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세상이라는 에스컬레이터가 아래를 향해 제 속도로 내려가고 있고 자신은 위를 향해 최선을 다해 올라가고 있지만 늘 제자리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속도를 내는 일을 잠시라도 멈췄다가는 뒤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부지런히 걸어가며 가까스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세상과 자신의 속도라고 했다.
속도측정불가시대-에스컬레이터.
속도는 속력과 달리 벡터값이다. 방향이 필수다. 그런데 세상과 나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속도 측정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일까? 속도를 알기 위한 시간, 거리, 방향을 알 수 없으므로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일까?
아프니까 청춘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청춘은 이제 없다. 청춘을 지나온 사람들이 회고하는 청춘에 대한 말들은 현재의 청춘들의 공감이 아니라 종종 분노를 불러온다.
노오력의 배신.
번아웃 세대.
조용한 퇴사.
요즘 청년들은 배신을 말하고, 소진을 말하고, 내세움이 아닌 물러섬을 말한다. 장년층이 느끼는 피로감과 청년이 느끼는 피로감은 그 색깔이 다른 것 같다. 장년층이 느끼는 피로감은 실제 몸을 움직여 생긴 노동으로 인한 피로감으로 노동의 결과가 주는 뿌듯함의 순간도 있었기에 크게 한숨을 쉬게 하는 해질녘의 색채라면, 청년의 느끼는 피로감은 피로를 넘어선 막막함과 절망 같아서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한 검은색 같다.
머지않아 청년이 될 아이의 청춘은 어떤 모습일까? 푸른 봄의 모습은 아닐 것 같아서 미안하고 불안하다. 흔들거리며 겨우 청춘에 이르렀는데 다시 또 더 크게 흔들릴 것이 눈앞에 보여 들어서기 버거운 시간이 올까. 열정을 불태워야 하는데 태울 열정을 다 써버려서 싸늘한 마음으로 사회에 나가게 될까. 속도를 측정할 수도 없고, 희망을 말하기도 어려운 청춘의 시간일 것만 같다.
이런 걱정을 하는 시간에도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별 것도 아닌 농담에 깔깔댄다. 그래, 내가 대신 겪어줄 수 없는 시간일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할 시간일 것이다. 지혜가 고민하고 흔들리며, 그래도 애를 쓰며 지나가는 시간을 아이도 애쓰며 건너갈 것이다.
애쓰고 땀 흘리고 눈물을 쏙 빼다가도 지금처럼 별 것도 아닌 농담게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뭔가가 손에 잡힌 것 같아서 눈빛을 반짝이는 순간도 있기를... 너의 청춘은 너의 것이니, 아무에게도 뺏기지 말고 네가 그 청춘을 온전히 너의 것으로 가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