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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Jun 22. 2023

물건이 나에게 얹어지는 순간

어떤 물건은 나에게 얹어지는 순간,  나를 그 물건에 맞추게 한다. 특히 '취향'을 표현할 수 있는 물건이 그런 것 같다. 그 물건이 나를 바꿔주기 때문에 그것이 '취향'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취향을 가지고 고른 물건, 그래서 나를 잠시나마 바꿔주는 물건은 힘이 세다. 내가 물건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나를 길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두를 신으면 발은 불편한데 이상하게 허리가 꼿꼿해진다. 동화 속에 나오는 춤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빨간 구두라도 신은 것처럼 구두에 얹어진 나의 허리를 자동으로 꼿꼿해지는 것이다. 그 허리의 긴장감 덕분에 구두를 신은 처음 몇 분은 기분은 좋다. 하지만 곧 불편함에 구두를 벗게 된다. 구두는 내 취향은 아닌가 보다.


어떤 사람은 만년필로 글씨를 쓸 때 저절로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고 했다. 만년필의 촉에 온 감각을 집중하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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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엔 정반대다. 만년필이나 예민한 펜으로 글씨를 쓰면 힘을 조절하지 못해 종이가 찢길 것 같아서 어깨와 손끝에 힘이 들어가서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어느 순간 나의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된 선이 그어질까 봐 편안하지가 않다. 그래서 만년필도 '아직'은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짝을 찾기를 기다리는 짚신처럼 나도 내 손에 딱 맞는 만년필이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나를 바꿔주는 물건은 '안경'이다. 안경 쓰는 것이 싫어서 수술까지 했지만 나의 눈은 다시 근시로 복귀했다. 다시 '안경'으로 복귀했다. 처음부터 안경이 나의 취향이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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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안경 쓴 사람이 많다 보디 여분의 안경테가 많아서 렌즈만 바꿔서 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전혀 다른 '내'가 되는 안경테를 쓰게 되었다.


렌즈 모양이 동그란 검정테 안경, 레오파드 무늬가 들어간 뿔테 안경, 커다란 렌즈를 가진 투명테 안경, 가벼운 금테 안경, 왠지 똘똘이 스머프가 된 것 같은 묵직한 테의 안경.

 

다른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지만 안경을 골라 쓰는 '나'는 안경에 따라서 다른 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흔히 말하는 비유적 의미의 '렌즈'가 나에게는 실제적 의미의 세상을 보는 '렌즈'가 된달까?


외출을 할 때 옷을 먼저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안경을 먼저 고르는 나를 발견한다. 에너지 넘치는 활동을 할 때는 투명테 안경을 쓰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날에 똘똘이 스머프 안경을 쓰는 식이다.


코 끝에 얹어진 안경의 감각. 눈을 굴릴 때마다 보게 되는 안경의 테의 윤곽. 그런 것들을 인식할 때마다 뭔가 안경에 맞춰 나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달라진다.


이런 취향의 경험을 좀 더 일찍 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커피 한 잔, 노트 한 권, 티셔츠 한 장, 연필 한 자루. 컵 하나.


작지만 나에게 나의 취향을 얹어 나를 맞춤하게 해 줄 물건들이 참 많다. 그렇게 정성 들이는 시간이 쌓이고 그 정성을 음미하는 시간이 쌓여 마음에 드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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