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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Feb 24. 2022

유통기한, 다가온 미래

  어제부터 벼르고 벼르던 라떼를 한잔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아이를 보내 두고 마셔야지 했다가 청소기만 돌리고, 빨래만 정리하고 마셔야지 했는데 아이가 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준비하다 보니 라떼를 잊었고,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앉았더니 잠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오늘의 커피를 내일로 벼르듯 미뤄두었습니다. 


  미뤘던 어제의 라떼를 위해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습니다. 원래의 무게보다 꽤 가벼워진 우유팩의 입구에 선명하게 적힌 날짜가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은 분명 2월인데 우유팩의 날짜는 3월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3월은 아직 아무 계획이 없는 미지의 시간인데 우유는 그 날짜의 계획이 분명한 듯 보입니다. 우유팩에 담기며 새겨진 그 날짜까지는 신선하게 담겨 있기로, 그 날짜가 지나면 미련 없이 떠나기로, 깔끔하고 담백하게 땅땅땅! 탄생하자마자 끝이 약속된 시한부의 우유. 분명히 저 우유를 카트에 넣을 때 저는 매의 눈으로 유통기한을 먼저 보고 가장 먼 미래를 약속하는 우유를 골랐겠지요.


  남은 우유를 탈탈 털어 따르고 나니 텅 비어 가벼워진 우유팩은 "저기요... 곧 3월입니다."를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고 장렬히 쓰레기통으로 버려졌습니다. 이렇게 저는 일주일쯤 먼저 우유가 알려주어 3월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을 3개 펴 봅니다. 손가락 하나의 외로움도 손가락 두 개의 뭔가 부족함도 없이 보기 좋은 손가락 모양이 만들어집니다. 


  비밀스럽게 유통기한이 슬며시 알려준 다가온 미래.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던 절대 불변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1초 단위로 밀도 있는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나 멍하니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는 사람에게나 절대 불변의 속도로 3월은 오겠지요. 시간에게서 눈을 떼고 신경 쓰지 않고 지낸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시간 위에 얹힌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멈춤의 순간에도 시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약속된 미래로 가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가차 없이 2월의 시간이 가고 3월이 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시작'에 가까운 3월이라고 우겨봅니다. 유통기한 전에 우유를 소진했음에, 아직 올해의 '시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아침입니다. 이제 워밍업을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일단 식기 전에 어제의 라떼를 마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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