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자취

이사를 했다

by 신호사


이삿날은 지난달 28일이었다.

이사할 때는 손 없는 날 뭐 그런 걸 확인해야 한다는데, 월세로 들어가는 세입자에겐 그런 걸 선택할 권리가 없다. 찝찝하지만 손이 같이 들어와도 별 다른 방도가 없다. 머리 맡에서 귀신이 춤을 춰도 악착같이 2년은 버텨야 하는 인간, 그것이 한국의 자취인.

그날 아침에 딱 눈을 떴을 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 이사 가기 너무 귀찮아. 내가 왜 나간다 그랬지.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째 '오늘의 집'과 '네이버 쇼핑'과 유튜브 속 온갖 랜선 집들이 영상을 보느라 심신이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와중에 결제로 이어진 건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뿐. 그래. 잠만 잘 수 있음 됐지, 뭐. 그러나 칼 배송이었던 프레임과 달리 매트리스는 내 이사 스케줄을 전혀 감안해주지 않았다. 덕분에 등 배기는 프레임 위에서 이틀 밤을 뒤척여야 했다.

어쨌든 다시 28일 아침으로 돌아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우선 거대한 가방 두 개를 펼쳐놨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단 화장실은 가야 하니까 두루마리 휴지 두 개, 세수하고 샤워도 해야 하니까 세면도구랑 타월 두 개, 씻고 나면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속옷이랑 잠옷들, 잠은 자야 되니까 베개와 이불, 그리고 각종 기계 액세서리들 일체. 그러고 나니 가방 두 개가 가득 찼다. 그때의 마음은 뭐랄까, 그냥 아무것도 -심지어 매트리스까지- 없는 에어비앤비로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내가 이사 가는 집은 본가에서 도보로 7분 거리. 처음부터 이사를 한 일주일 정도 할 생각이긴 했다.

11시 정도 되니, 이르게 퇴근한 엄마와 밥 먹으러 잠시 들른 아빠까지 도착. 둘이서 나보다 더 바쁘게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진짜 웃겼다. 둘이 경쟁이라도 붙은 것처럼 나한테 뭐라도 하나 더 쥐어줄라는 모습이 너무, 너무 그랬다. 그냥 뭔가, 그 모습을 거실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보고 있는데. 아, 결혼해서 집 나가면 이런 기분일까, 친정집 살림 털어가는 것이 이런 느낌이겠지 같은, 아마 내 인생엔 결코 없을 감흥이 아주 잠깐 일었다. 아냐, 그건 그냥 내가 살게. 그렇게 말해도 부모님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전투적으로 부엌을 터는 엄마와 안방을 터는 아빠. 덕분에 온갖 주방용품과 스마트 TV까지 덜컥 생겼다. 말하자면, '오늘의 집' 어플을 통해 꿈꾸었던, 나만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홈스윗홈은 애저녁에 나가리 된 거다. 절반은 엄마 취향, 절반은 아빠 취향에 나의 취향이 약 0.3% 정도 포함된 자취방. 그 0.3% 함유된 내 취향마저도 돈과 타협하느라 0.03% 정도로 낮아졌다. 매트리스 커버를 하얀색으로 구입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단 얘기다.

부동산 아저씨랑 같이 집으로 올라와서 상태를 확인하고 잔금을 치렀다. 복비는 20만 원. 개비싸다, 정말루. 그마저도 엄마가 2만 원 깎은 거다. 투잡으로 공인중개사 공부,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그러고 얼마 안 있다, 타이밍 좋게 프레임이 도착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없는 4.5층에게 가장 무서운 거, 그거 추가 배송료. 5층 아니라고 우겨봤자 달라지지 않는다. 배송료가 4만 5천 원이었는데 추가 배송료만 3만 5천 원 이어 가지고, 14만 원짜리 프레임 22만 원에 구입한 사람, 그거 나. 잠들 때마다 가로 눈물 흘리며 억울해했다. 왜 근력은 몸무게에 비례하지 않는 건가. 만약 그랬다면 내가 그냥 들춰업고 올라오는 건데. 엉엉.

침대 프레임 설치가 이루어지는 사이, 계약서 들고 주민센터를 방문했다. 무슨 확정일자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게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엄마가 하라 그래서 했다. 번호표 뽑고, 차례가 되어서 일단 월세 계약서부터 드렸다. 그러니 알아서 해주시더라. 친절한 분. 거주지 이전도 해주시고, 주민등록증 뒤에 주소도 바꿔 주셨다. 가족들 다 같이 옮기는 거냐, 혼자 옮기는 거냐 물어보시기에 혼자 나가는 거라 했더니 '아이구, 영광의 탈출을 하시는구나' 하시더라고. 순간 너무 행복해져가지곸ㅋ 감사하단 말이 절로 나왔다.

그 후 엄마는 집으로 가고, 나는 다이소를 털었다. 당장 쓸 물컵과 핸드 타월, 수저, 냄비 받침, 가위 따위를 구입해 왔다. 게 중 가장 유용했던 건 가위다. 내가 목을 따야 할 택배만 수십 개였기 때문. 자취 이사 필수품, 가위 혹은 커터칼. 잊지 말자. 땅땅땅.

오후 5시에는 내 인생 첫 당근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물품은 장스탠드. 백색 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늘 어두컴컴하게 있는 걸 좋아해가지구, 새 스탠드를 사려고 했는데, 아니, 같은 제품이 5천 원에 올라와 있는 거다. 걸어서 한 삼십 분 걸리는 곳이었는데 이참에 산책 좀 하자 싶어서 걸어갔는데, 아주 크게 후회했다. 내가 땀 찔찔 흘리고 온 게 짠해 보였는지, 친절하게 담아 갈 봉다리까지 쥐어주신 아저씨가 천 원 더 빼줬다. 19,900원짜리가 단돈 4천 원! 것도 전구 포함! 이 맛에 인간들이 당근, 당근 하는구나 싶었다. 커다란 투명 봉다리에 절반으로 분리된 스탠드를 담아가지고 달롱달롱 집으로 돌아오는 길, 월척 잡은 낚시꾼의 마음이 이럴까 싶더라고. 오는 길에 비가 조금 떨어질라 해서 오랜만에 경보 좀 갈겼다.

이미 상기 일정으로 인해 만 천 보 넘게 걸은 상황. 그치만 이미 3분 거리에 살고 있는 친구, 류와 함께 근처 마트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스케줄을 강행했다. 당장 내일 아침 끼니가 걱정되니까 시리얼이랑 우유를 담았고, 하필 비가 내려서 우산도 샀다. 멍청 비용. 으. 장을 보고 향한 곳은 류네 집이었는데, 내 방을 먼저 휘휘 둘러본 류가 저녁은 제 집에서 먹자고 했기 때문. 내가 지금 뭘 차려줘도 지금 너네 집에서 먹는 것보단 나을 거 같아,라고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얌전히 입 다물었다. 나의 다정한 칭구. 덕분에 그날 처음으로 밥 같은 밥을 먹었다.

암만 생각해도 프레임 위에서는 못 잘 거 같아가지구, 결국 본가로 향했다. 씻고 드러누우니, 아니,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싶더라. 전부 내가 자초한 거긴 한데, 이렇게 나갈 줄은 몰라가지구. 돈을 팡팡 썼으면 좀 달라졌을까 싶다가도, 팡팡 쓸 돈도 없으면서 이런 가정을 왜 해보는 거지 싶고.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서, 대체 뭐부터 시작해야 하나 머리로 가늠만 하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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