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을 땐, 일기
1.
밥솥 둘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전자레인지용 라이스 쿠커를 샀다. 현재까지 두 번의 시도를 했는데, 둘 다 망했다. 처음엔 죽밥이 됐다. 그다음엔 처음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꽤 오랜 시간을 돌렸더니, 아작아작한 강정이 되더라. 웃겨서 토 나오는 줄 알았다. 세 번째에는 밥다운 밥을 할 수 있을까. 그때도 망하면, 친구에게 밥솥을 구걸할 참이다. 으휴. 요리 못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똥멍청이가 된 기분이다.
2.
이실직고하자면, 현재 커다란 도자기 그릇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다. 밥도 거기에, 돈가스도 거기에, 샐러드도 거기에, 시리얼도 거기에. 접시 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렇다. 응. 다 핑계다. 그냥 하나만 있어도 그다지 불편한 일이 없어서 그냥 살고 있는 중.
친구가 이 얘기를 듣더니 실로 짠하단 표정을 지으며 접시 두 개를 줬다. 무려 코렐이다. 롱 래스팅 뷰티. 오예. 부침개를 담아도 넉넉할 만큼 커다란 접시 하나, 앞접시 하면 딱 좋을 접시 하나. 거기다 2,3인분 찌개가 가능할 거 같은 냄비도 줬다. 분명 자취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하! 나만의 취향으로 채워나가는 소중한 공간! 뭐 이런 기분이었는데. 지금 내 자취방? 거의 뭐, 아름다운 가게. 주변의 도움으로 채워나가는 짠한 공간, 뭐 이런 거 되어가는 중.
3.
최근에 화장실 전등을 갈았다. 층고 낮은 거 진짜 싫어하는데, 이번만큼 층고 낮은 내 자취방이 사랑스러워 보인 적 없어. 그럼에도 다시 갈 일은 없는 게 좋을 거 같아서. LED 조명으로 달았다. 형광등과 미색과 오렌지색 사이에서 한 10분 고민한 거 같은데. 고심 끝에 오렌지색 사 왔는데. 미색이 나았을 뻔했다. 하지만 낙장불입. 한 2년 간은 갈고 싶지 않아서, 낮에는 불도 안 켠다. 집은 북향인데 화장실이 동향이라, 어휴, 낮에는 어찌나 밝은지. 방보다 쾌적하다. 진짜 볼수록 이상하고 신기한 집.
4.
휴지 30 롤을 사서 화장실 수납장 가득 쟁여놓았다. 휴지 광공 된 기분.
5.
자취하면 원래 그런가. 냉장고 안에 엄청 신경 쓰인다. 쟤는 나한테 관심도 없는데, 난 하루 종일 쟤 안에 든 것만 생각 나. 뭐가 남았지, 유통기한은 언제 까지지, 저걸 어떻게 소비한담. 그렇다고 냉장고가 큰 것도 아니다. 딱 내 가슴팍까지 오는, 그냥 쪼그만 냉장곤데, 오늘 엄마가 준 메추리알 장조림 꺼내다가 그 뒤에 숨어있는 찬 밥을 발견해가지고 어찌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던지. 그 추운 데서 관심도 못 받고, 오늘 내가 장조림 먹을 생각 안 했으면 계속 그렇게 뒤에 있다가 천천히 쉬어갔을 거 생각하니까 끔찍해져 가지고. 으. 저녁에 당장 라면 끓여서 남은 국물에 말아먹었다. 덕분에 과식했네.
이건, 그냥 내가 음식물 쓰레기를 병적으로 싫어해서 그런 것도 있다. 일단 내가 먹으면 이제 뱃속에서 알아서 처리될 건데, 여기서 남긴다? 그럼 내 손으로 그걸 집어서, 음쓰 봉투에 담아서, 그걸 또 건물 아래까지 내려가서, 그 음쓰통을 열고 음쓰 봉투를 담아야 하는, 세상 번거로운 과정들이 존재하기 때문. 일단, 요즘 날 제일 괴롭히는 건 저 메추리알 장조림과 파김치야. 행여나 내가 다 먹기 전에 상해버릴까 봐 너무 신경 쓰여. 엉엉. 저번에는 엄마가 무생채 갖다 준다 했는데, 아니야, 엄마 그러지 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둘로도 족해. 셋은 버거워. 친구는 냉장고에 반찬 많으면 풍족한 기분이 든다던데, 난 그냥 그들의 존재를 감당해내기에 너무 그릇이 좁은 거 같다.
친구들이랑도 얘기한 거지만, 이제 현대인들에게 냉장고는 큰 의미가 없어. 냉장고보다 냉동고가 더 큰, 그런 형태의 뭔가가 나올 때가 됐다고 봐, 나는. 그냥 냉동 도시락 주문해서 쌓아놓고 싶은데 냉동고가 좁아터져 가지고 안 들어갈 거 같아서 하는 소리.
6.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어쩐 건지. 입꼬리가 텄다. 너무 아파. 다른 데가 텄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 텐데 하필 입꼬리가 터가지고, 밥 먹으려고 입 벌릴 때마다 살짝씩 더 찢어져서 너무 괴롭다. 아프고, 얄미워. 바셀린을 사흘째 바르고 있는데도 차도가 없다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건성도 아닌 주제에 환절기만 되면 이런 식으로 반항하는 거 진짜 너무 짜쳐. 으휴. 세상천지 내가 내 비위 맞추는 게 제일 어렵다. 증말.
7.
사이즈가 넉넉하고, 밑단에 고무줄 처리가 되어있음에도 저렴하고 튼튼한 수면바지. 는 아무래도 용 같은 존재인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거 같아. 대체 뭘 포기해야 하지.
8.
구관이 명관이라고. 전에 일기 쓰던 방식대로 쓰니까 훨씬 편하다.
그래요, 개가 똥을 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