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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A Oct 23. 2022

임신13. 남편이 육아용품 준비를 맡았다

그리고 싸웠다.

남편과 나는 미국 내 장거리 부부였고 우리가 사는 곳은 차로 12시간 떨어져 있다.

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출산 4주를 남기고 내가 재택근무로 전환해 남편이 사는 오하이오로 옮긴 뒤, 오하이오에서 출산과 산후조리, 그리고 육아를 할 예정이었다. 당연히 아이 방도 오하이오, 육아용품 배송지도 오하이오였다.


남편과 나는 공평하고 공정한 집안일 & 육아 분담을 지향했으나 임신/출산은 어쩔 수 없이 여자인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컸다 (임신도 4개월씩 번갈아가며 하고 출산도 몇 시간씩 번갈아가면서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육아용품 준비는 남편이 전적으로 맡기로 했다.

물론 나도 같이 논의하고 협력하지만 육아용품 준비의 주 담당자/책임자는 남편이었다.



하, 그리고 싸웠다.




우선, 육아용품 준비의 세부사항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크게 5가지가 있다.


1.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육아용품 리스트 2정도 다운로드하여 취합한다. 리스트를 보며  걸로 사야  , 중고나 나눔으로 마련할 , 없어도 그만인 , 사지 않을 , 4종류로 나눈다. 그리고 특별히 한국에서  오면 좋을 것들을 표시한다.


2. 지역 한인 사이트나 페이스북 마켓 플레이스 등을 활용해 우리가 필요한 중고 용품이 올라오면 구입하고, 주변 지인들이 나눠준 감사한 중고용품들을 세척하고 정리한다.


3. 새로 사야 할 물건들을 사고 세척 및 정리한다.


4. 한국에서 사야 할 물건들을 사서 배송시킨다.  


5. 육아를 위한 최적의 동선을 고민해 아기 방을 꾸미고 집 가구 배치를 바꾼다.





나는 남편이 육아용품을 준비하는 꼬라지(...)를 보며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일단, 나는 남편의 준비가 너무 굼뜨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배가 커가는 게 느껴지는데 남편은 태평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다시 오하이오로 돌아가는 36주 전에는 아기 방이 준비되길 바랬다. 한국에서 배송하는 물건의 경우 배송기간이 길고, 육아용품은 사면 끝이 아니라 설거지하거나 빨아야 하는 물건들도 있기에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내가 지나치게 서두르고 조바심을 낸다고 생각했다. 출산예정일이 한 달 넘게 남았고 더군다나 발목 수술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좀 더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없냐고 왜 이렇게 본인을 괴롭히냐고 했다. 미국에서 배송이 한국만큼 빠르진 않지만 아마존 프라임(2일 내 배송)이 있고 여차하면 직접 오프라인 매장 가서 사 오면 된다고 했다.


나는 출산예정일에 딱 애가 나오는 확률은 10프로도 안되고 그보다 일찍 나올 수 있다고 심지어 37주에도 나올 수 있다고 했지만, 남편은 만약 그렇게 일찍 나온다 해도 필수품인 카시트와 아기침대는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사실 양쪽 모두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남편이 그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육아용품 담당은 남편이니 믿고 맡기는 게 맞는데 닥달한 건 나의 잘못이다. 남편도 어느 정도 본인 잘못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언성을 높이며 싸운 건 아마도 각자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엄마 되는 거 무서워. 출산이고 신생아 육아고 다 모르는 거 천지야. 나는 엄마 될 준비가 안된 거 같아. 근데 육아용품도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더욱 준비가 안된 것 같고 미치겠어. 나 좀 도와줘.'


'나도 아빠 되는 거 부담스러워. 그래서 아이가 나오기 전까지 최대한 이 공간과 시간을 즐기다가 더 이상 육아용품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면 그때 하고 싶어. 안 한다는 게 아니잖아. 나를 믿고 내 페이스대로 하게 해 줘.'  



공동육아 1년이 된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편에게 육아용품 준비를 맡긴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육아용품을 준비하며 남편도 육아 세계를 많이 배우게 되었고, 출산 전 머릿속으로 많은 육아 시뮬레이션을 했다. 만약 공동육아를 꿈꾼다면, 육아용품 준비를 남편에게 맡겨보길 추천한다.


'아 그냥 내가 할게.'

이 말이 수십 번 목구멍까지 차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았다. 한번 이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공동육아의 길. 그래도 멀리 갈 거니까 함께 가고 싶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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