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방광-산동
다음날 난동마을에서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출발하였다. 난동마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산속으로 이어지는데 넓은 임도를 따라 걸으므로 겁먹지 않아도 된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길을 걷는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다. 수철-성심원 구간을 걸었을 때 아침재까지 한밤중에 걸었던 경험 이후, 이렇게 어둠 속에서 걷는 것이 오랜만이다. 그때는 점점 어두워지는 산길을 걸었다면 이번에는 점점 밝아지는 산길을 걷는다. 어둠 속에서 걸을 때는 내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그러다가 밝아지면서 나의 감각들이 분산되는 것 같다.
해가 뜨고 있다. 걷기 편한 임도를 따라 서서히 올라간다. 적당한 나무들이 우거지고 흙길이 섞여 있는 길. 이런 길이 바로 제대로 된 임도다. 소나무들이 근사하다. 여러 잡목들도 우거져 있다. 햇살이 비치면서 주변 풍경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그다지 힘들지 않았는데도 제법 고도를 높이게 된다.
고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을 운해를 보고 깨닫는다. 노고단에서 운해를 본 후로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멋지다. 멀리 산들이 섬처럼 보인다. 아까 지나온 길들도 구름 아래에 가려졌다. 지금쯤 난동마을은 안갯속에서 깨어나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길이 다 좋은데 한 가지 좀 거시기한 것은 송전탑이 지난다는 점이다. 이 송전탑이 산 꼭대기까지 쭈욱 이어지고 내려가는 길목에도 있다.
여기가 이번 구간에서 제일 높은 고개인 구리재다. 정자 옆길로 산 정상을 올라가는 길도 있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정자뿐 아니라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넉넉하게 있다. 아까도 말했듯이 송전탑을 계속 바라보면서 걸어야 한다. 심지어 바로 머리 위를 지나가기도 한다. 어쩐지 내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구리재를 지나 북쪽으로 내려간다. 길은 계속 잘 닦여져 있다. 반대편에도 운해가 멀리 보인다. 남쪽은 해가 다 떠서 운해가 사라졌는데 여기는 햇살이 아직 비치지 않아서 운해가 남아있다. 그러고 보면 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 같다. 해가 비추면 구름도 안개도 사라지고 햇살이 강하면 나도 걷기를 멈춘다.
양쪽으로 울창한 삼림지대가 펼쳐진다. 오래된 나무들이 빼곡하다. 나무에서 피톤치드가 엄청 뿜어져 나오나 보다. 아침의 나무 냄새, 숲 냄새가 너무 좋다. 이 깊은 산속, 이 높은 곳을 산길로 걸으려면 힘들겠지만 다행히 길은 넓은 임도다. 편하게 내려가다가 정자를 만나면 곧 숲길로 이어진다. 숲길로 내려가기 전에 정자에서 푹 쉬어준다.
이제는 산길로 한참 내려간다. 제법 산을 타는 느낌이 나는 길이다.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스틱을 짚으면서 간간이 사진을 찍어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울창한 숲이라 빛도 부족하다. 나는 사진을 잘 모르지만 사진에서는 빛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빛이 부족한 숲에서 찍은 사진은 대부분 흔들려서 보기가 좋지 않다. 아, 그리고 이 숲에서도 뱀을 보았다. 이번에도 나뭇가지인 줄 알았는데 뱀이었다. 스틱을 짚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숲길을 벗어나 조금씩 길이 넓어지고 곧 마을 길로 이어진다. 마을이 나오기 전에 구례 생태수목원이 있다는데 처음 걸었을 때는 인식하지 못했다. 나중에 역주행으로 걸으면서 보니까 구례 생태숲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미 한참 동안 숲을 걸어왔는데 일부러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다. 둘레길은 멋진 나무가 있는 마을로 이어진다. 바로 탑동마을이다.
탑동마을이라는 명칭도 여러 번 만나게 된다. 성심원-운리 구간에서도 탑동마을을 지났는데 여기도 탑동마을이 있다. 그때는 단속사지터와 삼층석탑이 유적지로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아주 소박한 탑이 한쪽에 다소곳이 서 있다. 여기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어서 탑동마을이라고 했다는데 그 삼층석탑이 저 석탑일까? 의구심이 든다. 둘레길 홈페이지에서는 삼층석탑이 무너진 것을 마을 사람들이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저 석탑이 그 석탑일 듯하다.
탑동마을에서 다리를 건넌다. 효동마을을 지나 멀리 지리산 온천단지의 끝자락을 보면서 걷는다. 지리산온천단지는 이제 많이 쇠락해서 영업을 하는 곳이 그다지 많지 않다. 효동마을을 지나 다시 개천을 건넌다. 개천물이 연두색이다. 역시 고여있는 물은 녹조가 심하다. 아침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해가 뜨거워지고 있다.
제법 큰 마을로 들어선다. 정겨운 골목길에 감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 뻗어있다. 마을 길은 다시 찻길로 이어지는데 커다란 농협도 있고 상점들이 늘어선 길도 나온다. 역시 면 사무소가 있어서 이 일대가 이 동네 핫플레이스인 것 같다. 산동면사무소에 도착하면 오늘의 둘레길은 끝난다.
방광-산동 구간은 대부분 숲 속을 걸을 수 있어서 한여름에도 걷기 좋은 길이다. 주변에 유명 관광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한 볼거리들이 제법 있다. 근처에 천은사도 있고 지리산정원, 구례 생태숲, 산수유휴양림, 구만제 등이 있다. 지리산정원 쪽에는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는 지초봉도 있다. 은근히 매력적인 장소가 많으므로 이 구간을 걷게 된다면 며칠 여유를 두고 가는 것도 좋다. 이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쩌면 내가 살고 싶은 곳을 또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