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산동-주천
이번에 걷게 될 산동-주천 구간은 총 15.9킬로이고 약 7시간 정도 걸린다. 난이도는 '중'이라는데 코스도 길고 큰 산을 넘고 산길 코스가 딱 가운데에 있어서 '중' 혹은 '상'으로 느낄 수 있다. 나의 경우 거의 9시간 정도 걸렸다. 한 번에 다 걷지 못하고 두 번 나누어 걸어야 했다. 좀 힘들지만 중간에 산수유 시목지도 지나고 아주아주 울창한 편백나무 숲도 지나고 무지하게 시원한 고개도 넘고 큰 저수지도 지나고 해서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한여름에도 걸을만한 길이다.
산동과 주천 모두 버스가 많은 곳이지만 둘을 이어주는 버스는 없다. 산동은 전라남도 구례군에 속하고 주천은 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하기 때문이다. 구례나 남원으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이쪽 코스는 이미 구례에서 멀어진 구간이기 때문에 남원으로 가는 접근성이 더 용이하다. 차를 가져갔다면 산동면사무소 주차장이나 주천 둘레길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산동면에는 아주 작은 식당들이 좀 있고 주천에도 식당들이 좀 있다. 2015년에 걸었을 때는 중간에 식당이 없었는데 2016년에 걸을 때 보니까 산수유시목지인 계척마을에 식당이 하나 생겼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적당한 식당이 둘레길 코스에는 없으므로 미리 먹거리를 잘 준비하자. 편백나무 숲길을 벗어나면 식당이 있는데 계절을 타는 곳들이라서 여름 성수기 아니면 영업을 안 한다. 중간에 가게가 없으니까 물도 잘 준비하자.
숙박은 산동 쪽에서는 지리산온천지구가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고 주천에는 인근에 펜션이 좀 있다.
산동마을에서 출발하면 한동안 19번 국도의 옆으로 나있는 작은 찻길을 걷는다. 그러고 보니 19번 국도는 섬진강부터 계속 둘레길 주변을 따라온다. 아니, 국도가 먼저 생겼고 둘레길이 나중에 생겼으니까 둘레길이 19번 국도를 따라가고 있는 거지. 이번에 걷는 길은 19번 국도의 좌측과 우측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어진다. 국도 주변으로 호박덩굴이 자라고 있다. 호박 크기가 장난이 아닌다. 19번 국도의 아래 굴다리 쪽으로 좌회전하여 현천마을을 향한다.
좀 이른 논에서는 곡식들이 영글어가고 있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았다. 2014년 8월에 지리산둘레길을 걷기 시작해서 2015년 8월에도 나는 걷고 있다. 무엇이 나를 지리산둘레길에 미치도록 만들었을까? 왜 나는 이 길을 걷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것일까? 나는 이 길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결국은 같은 질문인데 나의 어설픈 답은 늘 '그냥 좋아서'이다.
벼가 영글어가듯이 모과도 익어가고 있다. 석류도 붉게 익어간다. 감도 실하게 익어가고 있다. 이렇게 자연의 모든 것들이 익어가는데 나는 과연 익어가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작은 일에도 안절부절못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버거움을 느끼고, 뜻대로 되지 않은 일에 속상해한다. 매번 둘레길을 걸으면서 자연에 감탄하고 산과 나무를 닮은 큰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나의 성장은 먼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현천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현천마을의 근사한 나무 옆에는 화장실도 있다. 나무에 앙증맞은 무당벌레도 있다. 물론 진짜 무당벌레가 저 정도 크기면 그건 앙증맞은 것이 아니라 무서운 거다. 이 딱정벌레 모형은 밤에는 빛나는 야광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둘레길은 현천마을을 관통하지 않고 저수지 쪽으로 꺾인다. 그런데 저수지 둑으로 가는 길에 물이 많이 고여 있어서 약간 어려움이 있었다. 신발을 벗어야 할 정도는 아니고 살짝 수풀 쪽으로 걸어오면 건널 수 있다. 그렇게 저수지 둑길에 올라서면 물에 비친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볼 수 있다. 이날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아서 사진으로는 그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지 않는다. 산 그림자와 마을이 저수지에 비친 풍경이 근사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저수지 아래쪽의 풍경도 멋지다. 저수지둑길, 둑길에서 바라본 현천마을 모두 예술이다. 물안개가 필 때 와서 사진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둑길을 벗어나면 좁은 오솔길인데 라벤더 밭이 쫘악 펼쳐진다. 라벤더 맞나? 이것은 꽃검색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향이 좋은 걸 보니 라벤더가 맞는 거 같다. 그리고 오솔길이 이어진다. 길가에 익어가는 밤들이 탐스럽다. 아기밤이었는데 어느새 청년밤이 되어 곧 성인밤이 되겠다. 이런 것이 자연의 섭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익어가는 것. 나도 그렇게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다. 걸으면서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고민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나는 걱정과 고민을 한 보따리이고 걷고 있다.
숲 속의 오솔길을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넓은 길이 나온다. 그리고 남의 묘소 앞을 지나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계척마을이다. 마을 길이 낮은 돌담길로 이어져 아기자기하다. 그리고 돌담에 예쁜 아이들이 붙어있다. 아까 본 그 딱정벌레다. 아무리 봐도 야광이 맞는 것 같다. 아마도 마을 길이 좁아서 밤에 남의 집 담에 부딪힐까 봐 야광으로 붙여놓은 것 같다. 계척제라는 저수지가 제법 큰 저수지도 지난다.
둘레길은 계척마을을 관통하여 이어진다. 마을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산수유시목지가 있는데 지금은 무슨 유적지처럼 꾸며놓았다. 여기가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겹치는 지점이라서 꾸며 놓은 것이란다. 그런데 나는 이 길도 두 번을 걸었는데 산수유시목 사진을 제대로 찍은 것이 없다. 위의 사진은 영상으로 촬영한 것을 캡처해서 사진 화질이 좋지 않다. 어쨌든 이 산수유나무는 1,000년쯤 되었다는데 옛날 중국 산둥성의 처녀가 이곳으로 시집오면서 가져와서 심은 나무란다. 우리나라의 산수유는 이 나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전설을 접하고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1,000년 전에도 국제결혼을 했다는 점, 또 하나는 그 먼 데서 시집오면서 나무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둘 다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산수유시목지 근처에는 또 다른 근사한 나무도 있다. 수령이 500년 된 푸조나무란다. 이 동네 나무들은 1,000년이나 500년 정도 되어야 나무 명함을 내밀 수 있나 보다. 푸조나무의 수형이 근사하다. 푸조나무라는 이름이 낯설어서 검색해 보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울릉도에서 주로 자라는 나무란다. 열매는 식용으로 목재는 가구재로 사용되는 쓰임새가 많은 나무다. 푸조나무 훌륭한 나무네. 초면이라 몰라봐서 미안하다. 둘레길은 마을을 거의 다 벗어날 무렵 산 쪽으로 좌회전한다.
계척마을을 벗어나 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 걸어가다 보면 정말 뜬금없는 체육시설이 나타난다. 농구대, 배드민턴 등등의 체육 시설이 있다. 아마도 군민 체육대회 같은 걸 할 때 사용하는 시설인가보다. 그런데 정말 뜬금없는 장소에 대규모의 시설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체육시설들을 지나고 햇볕 피할 데가 없이 넓은 길이 좀 지루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건물들이 몇 개 보이면 길은 좌회전하여 오르막 산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 산길에는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정자와 의자들이 많이 갖추어져 있다. 구례군에서 조성한 편백나무 숲이라는데 사색의 길, 치유의 숲 등의 명칭들이 붙어 있다. 숲 아래로 내려가는 샛길들도 많은데 둘레길은 헛갈리지 않도록 벅수가 안내하고 있다. 정말 이 깊은 숲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힐링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