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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y 22. 2023

익어가는 것들(2)

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산동-주천


편백나무 숲길

여기는 기가 막힌 인생사진을 건질 수 있는 편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수령이 30년이 넘는 편백나무가 수만 그루 심어져 있다는데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장면이 기가 막히다. 깊은숨을 들이마시면 폐 속까지 나무 향이 가득해진다. 너무 좋다. 바로 이 맛에 둘레길을 걷는다. 시각과 후각이 마음껏 숲을 즐긴다. 청각적으로는 숲 아래쪽에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소리가 작게 들리는데 거슬리지는 않는다. 아래쪽에는 계곡이 있고 작은 유원지가 있는 것 같다. 한여름을 여기서 보내면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여름이 지나고 이 길을 걸었을 때는 아래쪽 유원지는 문을 닫았다.




편백나무 숲을 벗어나 대나무 숲으로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다시 잡목들이 우거진 오솔길이 나오고 작은 개울물을 건너게 된다. 그리고 대나무 숲을 지나게 된다. 둘레길에는 대나무 숲이 정말 많은데 느낌이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잠시 넋을 놓고 걷다 보면 지난번 걸었던 그 대나무 숲길 같아서 깜짝 놀랄 때도 있다.





동굴을 나와 임도로

갑자기 숲으로 된 동굴 같은 느낌의 길을 지난다. 나무들이 매우 울창하게 우거져서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밝은 곳로 나온다. 원래 새벽에는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딱 그런 느낌이 드는 장소다. 숲을 나와 넓은 들판으로 나오면 아주 작은 마을이 있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고 숲 속 오솔길을 한참 걸어왔기 때문에 이런 곳에 마을이 있는 것이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이곳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는 것을 보니 큰길에서 차로 진입하기는 수월한가 보다. 둘레길은 마을을 지나 임도로 이어진다. 




임도를 따라 올라온 밤재

잘 포장된 임도로 한참 올라가는데 둘레길 지도와 앱에서 알려주는 길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임도를 따라 슬슬 올라갈 수도 있고 중간에 숲길로 질러서 올라갈 수도 있다. 나는 당연히 편한 임도로 간다. 올라올수록 멀리 보이는 경치가 시원시원하다. 어느새 이번 구간에서 제일 높은 고개인 밤재에 도착한다. 밤재에서 산 정상까지 가는 길도 잘 닦여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넘은 구리재와 비슷하다. 그곳에서도 산 정상까지 가는 길도 있고 정자도 있었다. 다만 여기는 화장실도 있고 차를 주차시킬 정도로 공간도 있다. 한참 쉬다 보니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올라와서 정상까지 갔다 오는 사람들도 보았다. 아, 산에 오는 방법이 꼭 두 발이 아니어도 되는구나.





밤재 정자에서

밤재의 정자에서 한참을 쉰다. 잠깐 낮잠도 청해 본다. 그런데 춥다. 재를 넘은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경치를 본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근심과 걱정을 실어 보낸다. 아까 걷기 시작할 무렵의 복잡했던 생각들이 절반은 편백나무 숲에서 떨구어지고 절반은 밤재의 바람에 씻겨 내려간다. 그냥 걸었을 뿐인데 머리가 어느새 가벼워졌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냥 이렇게 살란다. 밤재의 바람처럼 살란다. 불어오면 불어오는 대로,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살란다. 





밤재를 넘어

밤재를 넘어서 북쪽으로 향한다.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19번 국도를 왼쪽에 두고 걷게 된다. 그리고 지리산유스호스텔 입구에서 굴다리를 지난다. 굴다리를 지나면 주유소가 나타난다. 박물관 주유소라는 이름이 독특하다. 여기 박물관도 없는데 왜 이런 이름일까? 검색해보니까 여기에 박물관을 건립 중이란다. 2015년 8월의 걷기는 여기서 끝냈다. 이후 다시 이 자리에서 걷기 시작한 것은 2015년 10월이었다. 슬프게도 2달동안 일이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굴다리를 지나 숲으로

둘레길은 다시 또 다른 굴다리를 지난다. 19번 국도를 지그재그로 통과한다. 짧게 도로 옆을 걷다가 곧 도로를 벗어나 숲길로 이어진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지만 힘들지는 않다. 작은 개울도 건너고 낮은 언덕도 넘는다. 숲이 지난번 왔을 때 보다 더 깊어진 것 같다. 2달이나 지리산에 오지 못해서 슬프지만 그 시간만큼 계절은 더 여물어가고 있었다. 오래 기다린 만큼 더 씩씩하게 걷는다.




익어가는 가을과 배롱나무

숲길을 벗어나면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논이 나타난다. 역시 가을은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길은 용궁마을로 이어지는데 중간에 고려시대의 효자각과 멋진 배롱나무가 있다. 고려시대의 효자가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병의 경중을 가늠하여 눈밭에서 고사리를 캐고 얼음을 깨고 잉어를 구해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고 한다. 옛이야기라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참 대단한 효심이다. 소심하게 반성해 본다. 그리고 멋들어진 배롱나무를 보고 또 감탄한다. 배롱나무는 어염집 마당에 심어진 것을 주로 보았는데 이런 위치에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장안제와 익어가는 감

효자각에서 조금만 더 가면 용궁마을이 나온다. 장안제라는 저수지를 끼고 낮은 담으로 이어지는 용궁마을길이 소담하게 이어진다. 용궁마을은 근처의 산봉우리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풍경이 바닷속 궁궐 같아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 용궁마을이라는 지명도 여러 지역에서 보았다. 아마도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마을에 용궁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나 보다. 이 마을은 외용궁마을과 내용궁마을로 나뉘는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다. 마을 어귀 감나무의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푸른색이던 감이 이제는 붉은색이 되고 있다. 벼도 익고 감도 익고 하늘도 익어간다. 



원천초등학교와 외평마을

작은 다리를 건너 실개천을 끼고 걷다 보면 원천초등학교가 나온다. 초등학교 담장 옆에는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운 비석이 있다. 2015년에 지날 때는 여기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최근에는 비석에 대한 안내문도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교를 지나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담장을 끼고 걷다 보면 외평마을회관을 앞을 지난다. 그리고 지리산둘레길 주천센터가 나타난다. 그러면 이번 구간이 끝난다. 


지리산둘레길 산동-주천 구간은 도 경계선을 넘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변에 큰 마을들이 많아서 언제든지 빠져나가 버스를 기다리거나 택시를 부를 수 있다. 둘레길은 숫자를 붙이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주천-운봉 구간을 1코스로 보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산동-주천 구간은 마지막 코스인 셈이다. 나는 하동읍-서당 구간과 오미-난동 구간을 지선으로 보기 때문에 이 구간이 마지막 19번째 코스가 된다. 지선까지 카운트하면 21번째 코스다. 어쨌든 이제 주천-운봉(1코스)과 운봉-인월(2코스)만 더 걸으면 지리산둘레길을 완주하게 된다. 아껴먹던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 입을 남겨둔 느낌이다. 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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