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주천-운봉
드디어 1코스다. 지리산 둘레길은 원칙적으로는 숫자를 붙이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천-운봉 구간을 1코스라고 하여 시작점으로 삼는다. 나는 3코스인 인월-금계 구간부터 시작하는 바람에 1코스와 2코스가 종주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제 지리산둘레길 종주의 끝이 보인다.
주천에서 운봉으로 이어지는 이 구간은 총 14.7킬로이고 보통 6시간 정도 걸린다. 난이도는 '중'이다. 내가 처음 둘레길을 걷기 시작한 2014년 여름에는 정말 느리게, 너무 느리게 걸어서 남들 걸리는 시간보다 2~3시간 더 걸렸다. 그러나 이제는 제법 속도가 붙어서 다른 사람들 가는 시간과 비슷해지고 있다. 물론 산길에서는 여전히 버벅대지만. 여기는 초반에 고도를 높이는 구간이 좀 힘들지만 그 이후로는 평탄하다. 구룡치 올라가는 구간이 지그재그로 숲길을 오르막으로 올라가는데 거기는 좀 힘들다. 하지만 전에 성심원-운리 구간의 웅석봉헬기장 올라가는 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쉬운 편이다.
주천이나 운봉 모두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고 한 번에 연결도 된다. 중간중간 버스정류장이 있는 마을도 많이 지나므로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전체적으로 버스길과 가장 많이 만나는 코스다.
주천과 운봉은 모두 식당이 있는 큰 마을이다. 중간에는 구룡치에서 숲길을 벗어나는 지점에 주점도 하나 있고 그 밖에도 둘레길에서 조금 걸어 나간 곳에 식당이 있을 것 같은 지역들이 있다.
숙박은 주천 인근에는 숙소가 많았는데 운봉은 그보다는 좀 적었던 것 같다.
주천에는 지리산둘레길 안내센터가 있다. 센터에서 길을 건너 개천을 끼고 내려가다 보면 펜션이 몇 채 있는 길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너게 된다. 외평마을에서 내송마을로 가는 길목이다. 2015년에는 징검다리만 있었는데 최근에는 나무다리가 새로 놓였다. 건너는 맛은 징검다리가 재미있으나 비가 많이 올 때는 새로 놓인 다리가 안전하다.
100미터 정도 찻길 옆을 걷는다. 다행히 여기는 인도가 있는 길이다. 둘레길은 내송마을을 앞두고 작은 농로로 이어진다. 처음에 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앞서 가는 사람이 둘레꾼인 줄 알고 따라가다가 남의 집으로 들어갈 뻔했다. 앞서 가던 사람이 알고 보니 동네 주민이었던 것이다. 예전에 많이 막히던 길을 운전하다가 앞에 서 있던 차가 옆으로 빠지길래 따라갔더니 남의 집 마당으로 들어가서 깜짝 놀라 차를 돌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렇게 따라 들어온 차가 내 차만이 아니었다. 서로 당황하면서 차를 돌리던 그 표정들이 떠오른다. 이번에도 별생각 없이 따라갈 뻔했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무 생각 없이 주변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 가게 될 수도 있다. 정신 차리고 내 길을 잘 찾아가야겠다.
내송마을의 옆을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되고 올라가야 한다. 곧 개미정지라는 곳이 나오는데 내송마을의 서어나무 숲 속 쉼터다. 나무그늘에 앉아 쉬어갈 수 있어서 좋다. 옛날에 남원으로 장을 보러 가던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란다. 되게 오래된 길이다. '정지'라는 말은 쉼터를 의미한단다. 여기가 개미정지라고 불리게 된 옛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경남 장군이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개미떼가 나타나 장군의 귀를 물어뜯어서 깨었는데 왜군이 쳐들어오고 있었다고 한다. 개미떼의 도움으로 대비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이곳을 개미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참 신통방통한 개미떼다.
계속되는 오르막이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에구구 소리가 난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이럴 때는 자주 뒤를 돌아보아 주어야 한다. 경치가 위치마다 변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울창하게 보이는 풍경도 있고 나무에 가려졌던 들판이 수줍게 드러나는 풍경도 있다. 앞만 보고 가지 말고 가끔 뒤를 돌아보자. 산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지그재그 산길이 이어지니까 나중에는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좁은 굽이길을 아까도 돌아서 올라갔는데 또다시 비슷하게 생긴 굽이길이 나타난다. 문득 산귀신에 홀린 것이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구룡치 푯말을 보고 안심을 한다. 귀신에 홀린 것은 아닌가 보다. 그런데 구룡치에 도착한 후에도 오르막은 한동안 계속된다. 사실 구룡치에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이때가 이 구간에서 가장 힘들었다. 왜냐면 이제 오르막이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다시 오르막이 계속되니까 짜증이 났다. 생각해 보니까 그게 뭐 그리 힘든 길도 아니었는데 결국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더라는 것이다.
산속에서 돌무더기가 잔뜩 쌓여있는 곳을 지난다. '사무락다무락'이라는 재밌는 이름을 가진 곳이다. '사망(事望, 사업 등의 앞길에 비치는 좋은 징조나 전망) 다무락(담벼락의 남원말)'이 운율을 맞추어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는데 이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무사함을 빌고자 하나 둘 돌을 쌓아 올려 이렇게 돌탑밭이 된 것이란다.
이 길은 지리산 깊은 산골의 마을 주민들이 멀고 먼 남원까지 장을 보기 위해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한번 장에 가려면 2박 3일이나 걸렸다고 하니 정말 옛날에는 장에 가는 것이 큰 일이었을 것 같다. 장에 가서 팔 산나물, 약초를 이고 지고 며칠을 걸어서 갔다가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다시 이고 지고 이 길을 걸어 집으로 갔을 것이다. 아마도 아이들은 장에 간 아버지와 어머니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겠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걸으려니 살짝 눈물이 고인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장에 간 부모님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짠하게 그려진다. 기형도의 시 중에 '엄마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시다. 그냥 그런 상상이 머릿속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