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방광-산동
어느 순간부터 둘레길을 구간별로 끊어서 걷지 않는다. 한여름의 태양을 피해 걸어야 하기도 하고 연휴 기간에 맞추어 달려와 일정에 맞추어 걷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구간을 걸었던 때는 연휴가 3일 붙어 있었다. 그래서 송정-오미 구간 중 일부와 오미-방광 구간, 방광-산동 구간을 연달아 걸었다. 3일을 내리 걸어도 힘들지 않았냐고? 너무 좋았다. 나의 셀카 표정을 보면 정말 신났다.
이 시기가 지리산둘레길에 대한 열정이 가장 불타오르던 때였고 그래서 지리산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던 때였다. 물론 지금도 지리산둘레길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지만 꿈속에서도 걷는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살고 싶은 곳 1위가 송정-오미 구간에 있는 파도마을이라면, 살고 싶은 곳 2위는 이번에 지나게 되는 난동마을이다. 심지어 내가 찜한 땅도 있었다. 내가 찜한 땅은 난동마을 근처의 밭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다음번 다시 걸을 때 보니까 누가 벌써 거기에 집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 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해서 나에게 좋아 보이면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좋아 보였나 보다. 나도 모르게 땅을 빼앗긴 기분이 드는 건 뭘까?
방광에서 출발하여 산동까지 가는 18코스는 총 13킬로이고 시간은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나의 느린 걸음으로도 그 정도 걸렸다. 중간에 큰 재를 넘기 때문에 난이도는 '중'에 속한다. 하지만 산길로 넘는 것이 아니라 임도를 따라 구불구불 느릿느릿 올라가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다. 임도 중간에 산길로 가로질러 올라가는 길도 있더라마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난동마을을 지나서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산속에서 보내기 때문에 한여름에 걷기를 적극 권장한다. 진짜 시원하다. 정자에 누워 쉴 때에는 약간 추울 정도였다.
방광, 난동, 산동 모두 농어촌 버스가 하루에 5~6번 정도 다니는 편이므로 이용하기 편하다. 대부분이 구례를 향하기 때문에 노선과 시간을 잘 확인하여 이용하면 된다. 차를 가져간다면 방광은 버스 정류장 앞 공터에, 산동은 면사무소 주차장에 세워둘 수 있다.
도착점인 산동면에 식당이 몇 개 있으나 방광과 난동에는 먹을 만한 곳이 없으므로 잘 생각해서 준비해야 한다. 특히 산속 구간을 한참 걸으므로 물 등을 넉넉히 준비하자.
방광과 산동 모두 숙박시설이 없다. 하지만 방광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민박과 펜션이 조금 있다. 산동은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지리산온천관광단지가 있으므로 그곳을 이용하면 겸사겸사 좋을 수 있다.
방광마을에서 길을 건너면 참새미골 계곡 쉼터라는 곳이 나온다. 여기는 평상도 있고 간이 수영장도 있어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여기를 흐르는 물이 천은사에서 흘러내린 물이란다. 한적한 곳에 물도 맑고 사람도 붐비지 않아서 쉬다 가기 좋을 것 같다. 사설로 운영되는 것 같은데 둘레길은 이 쉼터의 안쪽으로 계곡을 건너 이어진다.
계곡을 건너면 바로 숲길로 이어진다. 숲길이 참 예쁘다. 나중에 둘레길에서 만난 다양한 길들의 사진만 따로 모아 봐야겠다. 시멘트길, 흙길, 오솔길, 아스팔트길, 마을길 등등... 정말 다양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숲길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중간중간 포장된 길도 만난다.
숲을 걷다 보면 멀리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구간도 있다. 구례를 지나면서 섬진강 줄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신 푸른 산과 들이 계속 이어진다. 걷는 중간에 수로도 나타난다. 이 깊은 산골에 수로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여기에 무엇이 있길래 이런 수로를 놓았을까 싶었는데 곧 감나무 밭이 나타난다. 역시 이유 없는 수로는 없다.
지난번 보았을 때 아기감들이 이제는 청소년감이 되었다. 야무지게 커가는 모습이 농부가 아닌 내 눈에도 뿌듯해 보인다. 이 일대는 감나무 밭을 질러가도록 되어 있다. 둘레길은 남의 사유지를 지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도 그런 듯하다. 길을 허락해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그리고 남의 소유물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당동마을을 지난다. 너른 들판이 풍요로워 보인다. 지리산둘레길 홈페이지를 찾아보니까 이 마을은 고려 때부터 100여 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지만 남악제를 지내기 위해 남원부사와 고을 수령의 발길이 잦아서 피해가 많아 사람들이 떠나는 바람에 마을이 작아졌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높은 것들이 자주 오면 좋지가 않다.
한참 푸른색이 가득한 자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독특한 건물들이 보인다. 여기는 구례예술인마을이다. 화가, 건축가, 도예가 등 예술가들이 모여서 이룬 마을이란다. 어쩐지 건물들이 범상치 않다. 마을 규모가 제법 큰 것이 경기도의 '헤이리'가 연상된다. 그런데 이 예술인 마을은 여기 토박이 분들이 사는 마을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잘 몰라서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지리산둘레길 어딘가에 내 삶의 마지막 둥지를 틀고 싶은 나로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다. 지리산둘레길은 예술인마을의 뒤쪽으로 이어진다.
예술인마을 뒷길을 빠져나와 큰 찻길을 건너면 바로 난동마을이다. 여기는 오미마을에서 갈라졌던 오미-방광 구간과 오미-난동 구간이 만나는 순환지점이다. 난동마을까지 왔을 때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해서 걷기를 멈추었다. 이날 화엄사 입구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방광마을을 지나 이곳 난동마을까지 걸은 것이다.
난동마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평화로워 보이고 주변 환경도 너무 번잡하지도 너무 외진 곳도 아니라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딱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했다. 당시에는 밭이었는데 멀리까지 시야가 탁 트이고 앞뒤로 길도 잘 뚫려있고 마을 중심부와 적당한 거리라서 마음에 딱 들었다. 그래서 저 땅을 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인연이 아닌 것을 어쩌랴. 다음번 방문했을 때 그 땅에는 이미 집이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