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운 생활 : 판타지 소설
어릴 적 판타지 소설가가 꿈이었다.
물론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한 무수한 판타지 소설들 중에서도 특히 이영도라는 걸출한 작가의 덕택이 크다. 책을 펴는 순간 주변의 시공간이 사라지고 책 속의 세계에 빠져드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게 해 줬으니까. 그의 판타지 소설 덕분에 유년시절의 나는 무수한 밤잠을 설칠 수 있었다.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시리즈에는 세계의 주요 종족 중 하나로 '도깨비'가 나오는데 이것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흔히 판타지 소설이라 하면 중세 서양을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판타지 소설이 서양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이기 쉬우나, 생각해 보면 우리네 옛날이야기도 모두 판타지 소설이었던 것이다. 제비가 박씨를 물고 오고, 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두르고, 호랑이가 말을 하고, 이무기가 승천해 용이 되고, 하늘에서는 선녀가 내려온다. 대표적인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에서도 도술에 축지법에 난리도 아니다. 심청이도 전우치도 장화 홍련도 모두 훌륭한 판타지 소설이다.
※ 이영도 : 국내 판타지 소설 작가의 시조새 급이라고 할 수 있다. <드래곤 라자>와 <눈물을 마시는 새>가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유'로운 노예와 '복수'를 위해서만 사는 해적의 이야기인 <폴라리스 랩소디>를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그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은 늘 주류 문학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국문과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판타지 소설을 더 깊이 공부하고 그 가치를 알리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지만, 당시 국문과 분위기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였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어쩌고, 비평이론이 저쩌고 논쟁하는 틈새에 판타지 소설이 낄 자리는 없었다. 판소리계 소설 같은 전통문화로서의 판타지 소설은 높게 평가하면서 근대화 이후의 소설은 판타지 소설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중잣대가 있었다. 서구식 근대화론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들이 보기에 판타지 소설은 '문학 작품'도 아니었고 비평의 대상도 아니었다.
아무나 인터넷에 올려서 연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뭐가 어때서?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시대가 2020년대이고 이곳이 브런치이기 때문이고, 2000년대까지만 해도 등단이란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웹에 올린 소설은 국문과에서 작가나 작품 취급 받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사라진 도서 대여점 같은 곳에서 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출판을 하더라도 '등단'으로 인정을 못 받았다.
그렇다.
그들은 스스로 '문단(文壇, The literary world)'이라고 부르는 기득권 세계를 만들고 그곳에 오르는 '등단(登壇)'이라는 절차를 통해 비로소 작가로 인정받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권위 있는 심사위원과 평론가들이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과 현란한 이론으로 평론을 해주면서 작품을 예술로 격상시켜 권위를 만들어주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대중문학과 자신들을 오히려 구분 지었다. 구분 지어야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판타지 소설과 같은 장르 문학은 그 태생적 뿌리부터 대중들의 것이었기 때문에 비평할 가치가 없는 작품으로 취급했다. 예술적 권위를 부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판타지 소설은 대중들 속에서 탄생했고, 오직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느냐 없느냐로 평가되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평론가의 권위 같은 게 작동할 틈이 없었다. 평론가가 뭐라 떠들던 내가 재미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결국 소설은 즐기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다. 물론 식민지와 분단의 아픈 역사 때문에 문학에서 어떤 의미와 정신, 목적의식을 찾으려 한 맥락은 이해하지만, 정작 즐기기 위해 탄생한 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는 문학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쨌든 시대가 변했고, 문단과 비평의 권위도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요즘은 이곳 브런치를 비롯해 다양한 플랫폼에서 작가가 될 수 있다. 공모전과 출판의 루트도 다양해져서 입상이나 출판이 곧 권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스펙 쌓기 같은 느낌이 된 것 같다. 부당한 권위가 해체된 것은 좋지만, 한편으론 작가라는 직업도 스펙을 쌓고 팔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이렇게 권위주의가 지나간 시대에 자본주의가 왔다.
등단이라는 권위주의는 자본주의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늘 양면성이 있다. 지난 시대의 부조리를 쓸어버리는 혁명성이 있는 반면, 시장에 잘 팔리는 것만 무한히 복제하고 안 팔리는 것은 퇴출시키는 야만성과 폭력성이 있다. 지금 서점가에는 잘 팔리는 책들과, 그 책과 비슷한 책들이 양산되고 있다.
결국에는 이 책과 저 책이 다 비슷비슷해진다. 자본주의 특유의 독특한 획일화 습성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굳이 판타지 소설을 옹호하고 말고가 필요 없다. 판타지 소설도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라고 비하되던 시절을 이미 겪었다. 판타지 소설은 원래가 대중들의 것이었고 평론가들이 뭐라 떠들건 시대에 따라 자생적으로 변화해 나갈 것이다. 요즘 소설들을 보면 과거처럼 판타지나 SF, 추리 같은 '장르' 문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문학과 긴밀하게 결합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 진화하면서 도태될 건 도태되고 살아남을 건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다. 요즘 세상에서는 등단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올라야(登) 하는 단(壇)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fantasy)에 가깝다.
오히려 지금 시대의 과제가 있다면 자본주의 특유의 콘텐츠 획일화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발굴해내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잘 팔리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작품들을 발굴해내는 일 말이다. 내가 추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팔리는 블록버스터급 소설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좋은 작품들을 발굴하여 공유하는 것. 결국 인플루언싱(influencing)의 본질은 그런 역할 아닐까.
나에게 판타지 소설은 추억 속 취미생활이고 여전히 그 장르를 사랑한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도 과거의 모습에,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와 <드래곤 라자>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의 판타지 소설이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즐거움을 나에게 주었던 것처럼, 늘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모든 개척자 같은 콘텐츠들을 응원한다.
일상을 덕질하듯 살아가며 매일 새로운 것에 꽂히는 '취미 작가'가 들려주는 슬기롭고 풍요로운 취미생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