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의 시작
'하루 다섯 개의 why로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수 있다. 나도 처음에 그랬다. 처음 ‘why습관으로 한계를 돌파하라’라는 강의를 들었을 때 설렘과 함께 ‘정말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기 때문이다. why를 날마다 쓴다고 전업 육아맘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스스로를 얕잡아 보았다. 아기만 키우는 '전업맘 주제에'라고 주제 파악을 너무 잘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 why 5개는 정말 너무 중요한, 무릎을 치고 감탄할 만큼 의미로운 것이었다.
2014년 12월 31일 전보라의 why노트 1일 차
왜 종교를 가져야 하는가?
왜 습관 잡기가 어려울까?
왜 아이들은 말을 안 들을까?
왜 나는 아이 맘을 모를까?
왜 나는 신랑이 좋을까?
지금은 멘토님이 되신 <강사력>의 정찬근 강사님의 강의장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why습관으로 한계를 돌파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제 e-mail로 why 5개를 보내주세요.” 마법 같은 말이었다. 지금, 바로 보내라는 그 말에 이끌려 시작된 첫 why였다. 오래 생각할 시간을 주신 것도 아니었다. “새털같이 가볍게 시작하는 겁니다. 습관으로 정착될 까지는 아주 가볍게 폼 잡지 않고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why노트의 시작이었다. 5개로 시작한 why노트는 20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1만 개가 넘는 질문을 기록하게 되었다. (사실 5개의 why가 익숙해진 이후로는 5개 이상의 why를 쓰니 2만 개쯤 되지 않을까?) 1만 개의 why를 기록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은가?
첫 번째 why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why를 900일가량 던졌던 어느 날, 멘토님께서는 900일 피드백 발표를 하라고 하셨다. 발표 자료를 만들기 위해 다시 첫날의 why를 읽었다. 그때는 명확한 나만의 답을 내릴 수 없었던 why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그때의 감격을 why노트의 빈 공간에 메모해 두었다.
2017. 4. 18 기록
와~대박! 첫 why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나를 발견하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읽을 수 있고, 아이의 마음, 가족의 마음이 느껴져서 눈물짓고, 진정 안아줄 수 있는 시간도 갖게 되었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타고난 본성대로 탐구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임을 깨닫다.
습관이라는 것이 어렵지만 꾸준히 기록하면서 실천하면 하나씩 얻어지는 것임도 알았다.
종교는, 정말 외롭고 힘들고 의지할 곳이 없어 마음의 평안을 위해 절대자인 신을 찾는 것임을 말이다. 그리고 나에겐 그 절대자가 신랑이었음을.... 신랑을 선물처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비교가 아닌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내가 신기하다.
고통은 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구나!
이 고통은 나를 성장시키라는 신의 why이고, 답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고,
그 답은 항상 옳다.
내가 만든 why노트를 3번째 읽는 날이었다. 즉흥적으로 쓴 메모였고, 신랑에게 가서 고백했다. “오빠, 20대 내가 힘들 시간을 위해 신이 오빠를 선물처럼 나한테 보내준 거였어!” 이 말과 동시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지금껏 내가 선택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내뜻대로 내가 만든 세상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why를 통해 깨달았다. 하루는 신이 사랑과 함께 보내준 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우리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1일 차 why들은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하루 중 가장 생각나는 무의식적이고 감각적인 why가 나온 것다. why들은 내가 언제 다시 보느냐에 따라 다른 답을 이끌어 준다. 그 당시의 내 마음과 생각, 그리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돌아볼 수 있다.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3자의 입장에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폭풍우 속에서는 폭풍과 맞서느라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하지만 폭풍우 치는 상황을 한 폭의 그림이라고 보고 why를 던지면 그 속에서 나오는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문제에 빠져 있다 보면 그 문제에 매몰되고 말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해결책을 구하다 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루 다섯 개의 why로 스스로를 읽을 수 있다. 그 날의 질문을 읽다 보면 또 다른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게 된다.
왜 나는 2014년 12월 31일에 강의장에 갔을까?
왜 강의장에서 질문 5개를 보내라는 말에 why를 보냈을까?
왜 날마다 5개는 것에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왜 하필 마음에 대한 why를 던졌을까?
왜 내가 평소에 하고 있던 생각을 why로 잡아챌 수 있을까?
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짧은 답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why하고 답을 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모든 상황에 자동적으로 why가 나온다. 문제는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부모와의 갈등, 자녀와의 갈등, 직장 동료와의 갈등, 나와 나 자신과의 갈등 말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갈등을 해결하려면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대화에는 질문이 필요하다. 상대에게 어떤 why를 던지느냐에 따라 다른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둘째가 7살 때의 일이다. 나는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었고, 첫째는 아빠랑 바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둘째는 아이클레이를 만지고 싶었나 보다. 10시가 넘은 시간에 아이클레이라니, 내 생각은 ‘이 시간엔 절대 안 돼.’였다. 둘째는 나에게 와서 물었다. “엄마 아이클레이 해도 돼?”, 나는 거절을 하고 싶었고 내가 그 거절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신랑도 안된다고 할 줄 알았고 턴을 신랑에게 넘기고 싶었다.(사실 아이에게 안된다고 하면 아이는 울고 떼쓰는 것을 내게 하는 것이 싫었다.)“아빠에게 물어봐. 아빠가 된다고 하면 해.” 아이는 아빠에게 “아빠, 언니랑 아빠랑 그거 하는 동안 아이클레이 해도 돼?”하고 물었다. “응. 그래.” 아이의 why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으려면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why 하루 5개가 가져다준 놀라운 변화는 내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나와의 관계가 부드러워졌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알아차리기(관심)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 why 하루 5개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받고 자란 것들은 빛이 난다. 자신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why로 내가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아이처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사랑받으러 세상에 왔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못난 엄마라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모든 문제는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모든 문제는 모두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why 하루 다섯 개로 나다움을 찾는 여정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