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오늘의 식탁 - 8월 22일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활동하시는 부모님이 영국에 오시는 날이다. 디저트로 무얼 해드릴까 생각하다가 판단 시폰 케이크로 정했다. 슈퍼에 파는 재료가 별로 없어 매일 당근, 토마토, 아보카도만 드신다는 부모님 이야기가 짠해 이번에 오시면 먹는 건 제대로 챙겨드릴 생각이었다.
엄마는 영국 생활할 때 한국/중국 슈퍼에 장을 보러 갈 때마다 판단 케이크 한 판을 꼭 사 들고 오셨다. 은은한 코코넛 향이 풍기는 시폰 케이크는 너무 달지도 않아 아메리카노 커피와 잘 어울리는 디저트였고, 질감이 푹신하고 가벼워 많이 먹어도 괜히 살이 찌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케이크였다. 특이한 연두색 또한 먹는 재미를 더했다.
런던 시내에 있는 중국 슈퍼에 판단 케이크를 사러 갔다가 작은 멜론 크기의 케이크가 7파운드(한화로 약 12,000원)하는 걸 보고 그냥 내가 만드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난 이렇게 용감하게도 선물용 케이크로 한 번도 만들어 보지 않은 레시피에 도전했다.
가운데 구멍이 나 있는 시폰케이크 틀도 아마존에서 미리 주문하고, 중국 슈퍼 세 군데를 뒤져 판단잎도 구해두었다. 판단 잎은 동남아시아 요리에 널리 쓰이는 열대 식물로,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선 가위로 조각조각 잘라 물을 넣고 믹서기에 갈아 즙을 내주어야 한다.
케이크 반죽으론:
1. 노른자 5개와 설탕 30g을 넣고 젛어준다.
2. 식물성 오일 3큰술과 코코넛밀크 100ml, 판단즙 2큰술을 추가해 섞어준다.
3. 밀가루 100g과 베이킹 파두어 1작은술을 반죽과 섞어준다.
그리고 머랭을 만든다:
1. 휘핑기로 흰자 5개를 휘핑해 준다.
2. 휘핑하면서 설탕 60g을 세 번에 나누어 넣어준다.
3. 레몬 2 작은술 추가해 준다.
머랭 반죽을 들어 올렸을 때 뿔이 생기면 완성. 머랭 1/3을 케이크 반죽에 넣고 거품이 꺼지지 않도록 살살 섞어준다. 나머지 흰자도 반죽과 잘 섞어 준 후 시폰케이크 틀에 넣고 170도로 예열된 오븐에 구워준다.
판단 시폰 케이크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을 때 서양 제빵 기술을 전수받으며 생겨난 케이크라고 한다. 2017년 CNN이 판단 케이크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국가 케이크로 선정할 정도로 판단 케이크는 인기가 많다고.
시폰 반죽은 다른 케이크 반죽에 비해 박력분이 적기 때문에 오븐에서 구워져 나온 후 꺼지기 쉽다. 이런 약한 구조의 시폰 반죽이 케이크 틀에 달라붙으면서 구조를 유지하기 때문에 팬의 표면을 최다한 넓히기 위해 가운데에 기둥이 있는 모양의 시폰틀을 사용한다고 한다. 굽는 과정에서 반죽이 표면에서 미끄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논스틱팬이나 유산지를 사용하면 안 된다.
이렇게 열심히 주의사항을 참고해 가며 케이크를 구웠건만 완성된 케이크는 기대한 만큼 부풀어 있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살포시 누르면 '팡'하고 탄력 있게 튀어야 할 케이크는 무반응일 뿐이다. 맛은 먹을만했지만 엄마 선물 줄 케이크라 오기가 나 다시 한번 베이킹을 시도했다. 머랭에 거품이 덜 들어갔나 싶어 정말 열심히 다시 머랭을 만들어 기포가 터지지 않도록 더욱더 조심조심 반죽을 섞었다. 그리고 탄생한 케이크는... 첫 번째 케이크 보다 더 푹 꺼진 채 오븐에서 나왔다. 두 번째 시도에서 포송포송하게 부풀었던 나의 기대와 소망도 함께 꺼지고 말았다.